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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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27 12:2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비뚤어진 기도 중심의 삶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느니라”는 성경구절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신약성경에서 “기도”가 명사로서 처음 사용된 곳이다. 마가복음 9장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 “기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참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의 신분을 밝혀주려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여기서부터 비뚤어져 나가서 결국 어디까지 이르게 될 것인가? 기도는 만병통치약으로까지 둔갑되었다. 주기도문은 대개 마지막으로 순서상 형식상으로 행해지고 있다. 주객이 전도(顚倒)된 경우이다. 한국 교회의 신앙생활이 왜 기도시간을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더 나아가 기독교의 중심이 기도에 있다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여기에까지 이르러 기도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려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한다. 문제는 삐뚤어진 기도에 대한 관점에 있다.
비뚤어진 기도는 왜 나오는가?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근거나 이유에 중점을 두고서 왜곡된 기도중심의 신앙 양태를 몇 가지로 분석해 본다.
첫째, 성경에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는 것은 어렵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눈앞이나 코앞에 힘든 문제가 닥치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나님께 구한다. 기도를 대개 이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성경적인 기도는 성경을 모르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비교적 짧은 주기도문은 “하늘”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 하늘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창세기의 “창조”부터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까지 어느 정도 이해를 필요로 한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영원 안에서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인간 자기의 뜻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둘째, 하나님을 크게 오해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보여주고 알려주는 것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기록하게 하신 목적은 매우 분명하다. 여호와 하나님을 자세하고 철저히 알려주려는 데 있었다.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욥기와 같은 진리 논쟁을 통하여 하나님을 욥에게 크게 가르쳐 주셨다. 많이 볼 수 있는 기도 제목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이다. 이것도 욥의 친구 빌닷이 자기가 마치 선생이나 된 듯이 욥에게 잘못 가르치고 있는 내용들이다. 성경을 모르는 것과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거의 비례한다.
셋째, 상대적인 욕심을 구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모두 인간들의 욕심이다. 우산 파는 사람이 비 오길 구하는 것과 짚신을 신은 사람이 비 오지 않길 갈망하는 것에,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할까? 이런 것을 고민하는 분이 하나님이실까? 모든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욕심으로 꽉 차 있다. 이것이 죄인 된 인간들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맹세이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으로 성경 어디에나 동일하다. 이 절대적인 뜻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해 아래서의 헛된 일이다. 바로 인간들의 상대적인 욕심의 표출들이다.
넷째, 잘못된 언어에 몰입한다. 성경이 이렇게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다. 그 이전에 이런 놀라운 섭리는 바벨탑 사건과 다 연결되어 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각국의 언어를 자기 나라의 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 사건이다. 지금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만이 하나님과 직통하는 것처럼 수작 부리는 것은, 성령의 권위를 위장하는 것들이다.
다섯째, 자기의 능력을 부각한다. 목사나 선교사 등의 명분을 위장하여 어떤 특정한 사람이 기도하면 응답이 잘 오는 것처럼 가르치기도 한다. 성경 모르면 하나님을 오해할 수밖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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