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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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2-02 18:5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주제 없는 이현령비현령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뚜렷한 중심을 잃고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곧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위 제목은 분명한 주제가 없을 때에 이현령비현령의 현상이 잘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2020년 세계사의 주제는 분명히 코로나19였다. 2021년도 1월이 막 지나가고 있다. 이러한 세월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주제를 잡고 누리기 위하여 오늘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다.
모든 방면에서 주제가 잡히지 않을 때, 누구나 방황하고 헤맬 수밖에 없다. 이토록 중요한 주제는 그 자체의 의미도 만만하지 않다. 주제는 대표이고 정상(頂上)이며 중심이다. 주제를 잡았다는 것은 중심을 잡았기 때문에 혼돈되지 않는다. 매사에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한다면, 그러한 것이 습관화되어 결국 심각하게 될 것이다. 개인에게나 사회 그리고 국가에 있어서 주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한 국가나 사회의 혼란은 어떤 의미에서는 주제의 부재로부터 온다고도 볼 수 있다. 주제는 사실 제목보다 더 이면적이다. 비유하자면, 제목이 겉으로 드러난 얼굴이라면, 주제는 마치 그 얼굴을 지닌 머리 안의 뇌와 같다. 여기에 주제의 중요성이 존재한다.
주제가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변에서 주제 없는 양상 즉 이현령비현령을 쉽게 볼 수 있다. 쉽게 자주 보이는 주제의 부재(不在)한 방면을 몇 가지로 검토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 성경의 주제가 없다. 보통 일반적으로 성경의 중심적인 주제를 놓치고 극히 부분적인 몇 구절을 인용한다. 그 인용이 ‘여호와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성경 본래의 주제에 충실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중심을 놓치지 않고 극히 부분적인 지엽에서 정상(頂上)으로부터 논리적으로 흐트러짐 없이 제자리에 위치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부분적인 서술(敍述)에서 제대로 해석되어지려면, 주제와 제목과 목차 등으로부터 차서(次序)를 따라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나와야 한다. 성경의 전체적인 주제가 분명하게 확증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쉽게 해석자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이현령비현령을 만들어 낸다. 특히 성경에 있어서는 전체적인 이해와 파악이 매우 중요하다. 모든 문제는 기본에 있다. 기본은 기초이며 근본이다. 구약성경을 통한 신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통한 구약성경만이 바로 온전한 체계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스스로를 여호와로 계시(啓示)하시기 위해 성경 전체를 기록하게 하셨다. 성경 전체를 본래의 목적과 주제대로 제자리에 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둘째, 인생의 주제가 없다. 인생의 주제는 “왜 사는가?”가 아닌가? 모든 내용에는 주제가 있다. 그 주제는 가장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에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라는 주제가 있다. 그 주제는 바로 생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 자체 곧 생존이 그들 인생의 주제이다. 과연 삶 자체가 인생의 주제가 될 수 있을까? 그저 살아 있으니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생각이야말로 이현령비현령 방식으로 달린 인생이 아닐까? 어쩌면 자기 생명의 주인을 알아보는 것도 인생의 주제를 찾는 한 방법일 것이다. “인생은 나그넷길”로 보는 해석은 과정이다. 그 인생의 출발과 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명되지 못한다면 이것 또한 이현령비현령일 것이다.

 셋째, 목차의 주제도 없다. 보통 책에서 목차를 차례와 같은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목차의 목적이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차례와도 약간 차별화하고 싶다. 간단히 비교하면, 목차는 차례라는 의미보다 더 입체적이고 유기적이다. 마치 이목구비를 지닌 사람의 얼굴과 같은 목차는 매사에서 중요하다. 주제에 의한 제목과 그 제목에 의한 목차는 체계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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