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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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1-17 21:0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교회개혁론』 저자와의 특별대담_02


교육 개혁의 근거 구절을 고린도전서 2장 7절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육 개혁의 원천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이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개혁에서 특히 중요한 교육 개혁은 인간이 만든 사상이나 이념에 기초해서는 불가능합니다. 본문 구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지혜’가 원천이어야 하며, 이 지혜는 만세 전에 미리 확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개신교의 교육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교회 교육’이란 ‘보혜사 성령의 교통하심에 따른 교사와 제자의 사귐’이라고 정의를 내렸는데, 구체적으로 개신교 교육의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기존 개신교 교육의 맹점은 성경 진리를 배제하고 인본주의적 상식이나 도덕을 가르쳤다는 데 그 심각함이 있습니다.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는 성경을 펼쳐서 시작하지만, 성경의 본래 의도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사도를 통해 성경 계시를 완성하게 하시고, 성경을 먼저 깨닫게 한 자로 다른 자를 제자로 삼아 다시 가르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의 교통하심’ 속에서 약속대로 지금도 복음 진리를 온 세상에 가르쳐서 전파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현재 실정은 목사가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자기 제자’로 만든다는 데 그 심각함이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오직 성경 진리를 통해서만 성도들이 각자 자유롭게 양육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독교 지도자들은 꼭 명심해야 합니다.

개신교의 교육 내용이 세속화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교육 내용의 세속화란 성경 진리가 세상 학문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 특별 계시의 기록을 함부로 평가하고 임의로 풀이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왜곡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교육 내용의 세속화입니다. 세속화의 핵심 원인은 성경의 내용이 담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한 데 있습니다. 즉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단일한 의미와 일관된 논리 체계, 그리고 통일된 전체 구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설교자 마음대로 편집하여 발설하고 있다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목회 현장을 보면서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경 내용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여 나온 책이 『의미분석 성경개론』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된 논리체계를 찾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교단에서 교사들이 가르치는 교육 내용이 성경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으며, 잘못 가르치는 교사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누가 걸러낼 수 있습니까?

성경 진리에서 벗어난 줄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 중에 영을 분별하도록 해 주시는 것(고전 12:10)으로 성경 진리를 깨닫게 해서 진리인지 비진리인지 알게 하십니다.
신약성경 특히 히브리서부터 유다서까지 내용은 성령께서 진리 투쟁을 어떻게 하게 하시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진리 투쟁의 전략이나 방법론까지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정확하게 지적하거나 반문하고 토론하여 무엇이 성경적인지 가려내는 실질적 활동으로 드러납니다. 비진리를 걸러내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되, 진리에 확신을 갖는 자들로 하여금 성경에 부합할 때는 ‘예’, 성경에 근거하지 않을 때는 ‘아니오’라고 말하게 하십니다.
분명히 다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예’라고 한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반대로 비진리라고 판정이 났다고 해서 그 대상을 물리적인 세력을 동원해서 과거 ‘종교재판’ 방식처럼 그렇게 행사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직 깨닫지 못한 자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실한 ‘기독교 교리’에 의한 부실한 ‘교의신학’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현대 개신교에서 ‘성경신학적 교의신학’이 가능합니까?

네,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선 기독교 교리가 부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관 즉 성경계시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올바른 성경관에 근거를 두고 신관이 정립되며, 인생관과 역사관 나아가 세계관이 확립됩니다.
저는 이 작업을 실제로 이렇게 수행했습니다. 우선 성경의 진리체계를 ‘언약성취섭리사’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성경신학총서’를 통해 주석했습니다. 그리고 이 총서에 근거해서 성경신학 부록(附錄)으로 『성경적 기독교』를 저술했습니다. ‘성경신학총서’ 중 마지막 결론이 『성경신학개론』입니다. 이는 신론 중심, 하나님 계시 중심의 신학(성경신학, The Bible Theology)에 관한 총체적 결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구조에 바탕을 두고 전통신학의 교의신학을 성경신학적으로 구조화한 것이 『성경적 기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더욱 병들게 하는 ‘세속화된 기독교 윤리’는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세속화된 기독교 윤리는 비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과 의지를 전제하고 외식적인 도덕적 행위를 마치 기독교의 선(善)처럼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인간 의지를 자극하는 도덕적 설교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면 이렇게 하는 것 혹은 저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무책임하게 주입된 그것에 의해 성도들이 억압을 당합니다. 세속화된 윤리적 가치들을 마치 가톨릭이 하는 천국 가는 ‘면죄부’처럼 매매하듯이 성도들에게 강매(强賣)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의 확증은 강요나 억압을 결코 동반하지 않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말씀을 깨닫게 하여 소원(자원)이 생기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각자 주신 여건과 생활을 통해서 깨달은 만큼 하나님의 선한 뜻을 추구하게 하십니다. 정리하면 세속적 기독교 윤리는 명제로 주어진 규범에 종노릇하게 하지만 성경신학적 기독교 윤리는 성령께서 쉽고 가벼운 짐을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 즐겁게 감당하게 하시는 삶입니다.

‘세속적인 사회정의’와 ‘성경신학적 사회정의’를 반드시 차별화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했는데 예를 들어 설명해 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사회정의(‘성경신학적 사회정의’)는 출발에서 결과까지 ‘세속적인 사회정의’와는 다릅니다. 인간들이 만드는 사회정의는 자신이 속한 사회 구성원의 유익을 위해서 상대적인 계약을 통해 수립한 사회 규범에 따르게 하는 구조입니다. 예를 들면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대립 상황에서 그것을 역시 대다수 인간이 원하는 대로 각색하고 선택해서 한쪽 편의 의견을 무시하고 강제 집행합니다. 이것은 항상 특정 그룹을 배제하고 억압하고 배척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올바른 사회적 정의가 아닙니다.
성경신학적 사회정의는 인간의 이념이나 사상이 기준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께서 통치자가 되시는 정의입니다.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돕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주신 은사이며 자기 손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자원해서 동참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가진 자의 재산을 억지로 빼앗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부요하신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것을 깨닫고 기꺼이 자원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사회적 정의입니다. 

개인적으로 ‘신비적 체험’이 많이 있는 줄 아는데 ‘신비적 체험’에 의한 교육은 왜 문제가 됩니까?

성경진리의 절대성과 객관성을 고려할 때, 신비적 체험은 한마디로 주관적이라는 데 그 폐해가 있습니다. 체험하는 사람마다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결과가 각각 다릅니다.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경험과 체험을 아무리 객관화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 세계에 속한 객관일 뿐입니다. 절대적 객관에 속한 진리를 주관적 체험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이 평범한 상식을 누구보다 기독교인들이 무시한다는 데 그 심각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객관적 진리 체계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신비적 체험으로 속고 속이는 일들이 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성령의 교통하심에 따라 성경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배워도 진정한 교회가 세워질 수 있다고 했는데, 교회의 기본 단위인 가정교회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두세 사람이 모여도 교회라는 말은 성령의 교통하심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두세 사람이 모인 인적 구성원이 되면 그것이 교회라는 말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게 했다면 그 모임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함께 하는 교회설립의 최소 단위로서 ‘지교회(支敎會)’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교회의 분명한 증거 사례가 바로 ‘가정교회’입니다. 남편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부인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의 모형으로 그리고 이러한 가정교회들이 여럿이 되면 ‘양육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한국교회는 목사 중심의 교회를 세우다가 ‘가정교회’를 허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교육 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교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교회의 원형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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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성경과 성경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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