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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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1-17 21:3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원어 성경과 성경 해석


페트로스가 보낸 둘째 유무를 보면 못 배운 이들과 안 꿋굿한 이들이 파울로스가 보낸 유무들에서 종말과 재림에 대한 가르침을 틀 안 잡힌 이들이 속임으로 망하도록 고문하듯 뒤트는 것을 경고했다. 성경이 자체로 오롯하고 넉넉히 밝히면서 절대권위를 지닌다. 언약사를 보면 첫 언약부터 새 언약에 이르기까지 첫 복스러운 예언명령의 말씀을 차츰 밝히면서 계시하신다. 성경기록 자체에 머무는 게 아니라 해석하도록 하면서 이끄심을 알 수 있다. 원어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유대주의와 비평주의 신학에서 다루는 원어성경해석은 명백히 거짓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대주석만 해도 이 두 부류에게 물들지 않은 주석을 찾아보기 힘들다.
성경 해석에 살붙인 것이 주석인데 성경 해석이란 원어 성경을 놓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역본 성경을 잘 이해해야 한다. 원어 성경을 번역한 게 역본 성경인데 뿌리를 모르면 헷갈리고 그르친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는 둘이 같은데 차이라면 원어 성경을 어느 만큼 특별히 해석한 게 번역 성경이다. 이 관계를 정말이지 잘 생각해야 한다. 원본주의와 역본주의가 도사리기에 그렇다. 원어 성경 없는 역본 성경이란 없다. 역본 성경을 모르는 원어 성경도 틀린다. 이것을 전제하고 성경 해석이 성립한다. 성경 해석을 다시 갈라서 앞 단계를 성경석의라고도 말한다. 석의가 본문 자체에 머문다면 해석에는 어느 만큼 주경학과 교의학이 깔린다.

정리하면 성경을 해석한 결과로 강론이 이루어진다. 성경 해석의 원리란 성경 기록 자체에서 나타난다. 원어 성경을 보면 성령님이 감동했다고 하는데 기록한 사람을 이끄셨기에 어느 만큼 해석하도록 하셨다. 원본이 이럴 정도라면 역본이야 오죽하겠는가? 역본 성경을 원본 성경처럼 여기는 일도 조심하자. 성경우상주의로 흐른다. 하지만 여기서 또 깊이 생각할 것이 있다. 성경을 가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성경 내용에서 더하고 빼는 일을 가감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가감을 넓혀서 생각해야 한다. 성경 해석이 선물이라면 거기도 가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강론도 가감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 성경의 일체성이 무너진다.
성경 해석이란 1차로 원어성경에서 비롯한다. 이어서 반드시 역본 성경을 해석하는데 이것이 주본이다. 그 역본이 아무리 잘 번역되었다고 해도 원어 성경을 반드시 전제한다. 두렵게도 아직 우리나라는 16세기 개혁자들이 번역한 원리로 번역한 성경이 없다. 그들보다 발전했어야 하는데 이런 유산이 없다.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는 속담이 있다. 말글에서 누가 온전하겠는가? 혀에 사망과 생명이 달렸는데 그만큼 언어의 부패와 악용을 조심해야 한다. 깔뱅만 하더라도 일생 동안 불어 성경을 계속 손질했고 로마주의 불가타 성경에 맞서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신약이 그 나라에 미친 영향이란 말할 나위가 없다.

전통원문에서 올바로 번역한 역본을 전제로 해석이 이루어진다. 종교개혁을 많이 말하지만 성경 번역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절대권위를 다시금 세운 것이 교회개혁인데 어떤 성경관이었던가 알고 이어나가야 한다. 깔뱅이 쓴 강요를 여러 가지로 받아들이는데 으뜸은 성경 내용을 알도록 적은 글이다. 그 강요가 현대교의신학의 원조는 아니다. 그래서 성경번역관, 원문관이 전제된 글이기에 제대로 이해하려면 원본 성경과 역본 성경을 충분히 알아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경해석이 이루어졌음을 판단해야 한다. 개혁자들이 본 원어성경을 뭉개버린 때이기에 두렵다. 편집한 비평원본으로 성경 번역을 했기에 다시금 해야한다.
원어 성경을 랍비들이 제아무리 아는 체해도 신약을 부정하기에 틀렸다. 현대판 유대주의를 조심하자. 현대히브리어를 바탕해 만든 타나크 라는 구약성경을 경제를 빌미로 퍼트린다. ‘메시아닉 쥬’ 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성경 해석이란 성경관 자체가 엉터리이고 마쉬아흐를 부정하기에 일고의 가치가 없다. 성서히브리어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혹세무민하니 조심하자. 나중에 다루겠지만 섭리 가운데 쓰신 히브리어조차 우리말로 조심스레 다루어야 한다. 유대신비주의에서 히브리어로 여러 가지로 장난질한다. 우리가 우리말을 모르기에 영적 사대주의로 흐른다. 그러면 성경 해석에도 잘못된 영향을 받는다. 이것을 크게 경계하자.

원어 성경으로 성경 해석하는 리치를 조금 말하는 중이다. 사람이 저마다 언어관을 지닌다. 그래서 선입견과 편견을 갖는다. 우리말 성경을 보아도 꿰뚫지 못하면 한글구역과 개역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의 영향에서 못 벗어난다. 더군다나 새번역이니 개역개정이니 하면서 뒤범벅을 만들었으니 심각하다. 그래서 개혁자들의 성경해석을 정리한 교리체계를 보아도 성경에 관한 전반을 마련하고 교리의 속뜻을 해석해야 하는데 이런 흐름조차 끊어진 때이다. 개혁과 발전은 고사하고 교리무용론과 교리우상론이 그득하다. 한마디로 성경을 잘 모른다는 말이다. 성경 해석을 모르면 성경을 관통할 수 없다. 선무당식 성경 해석을 물리치자.
수풀과 그 안에 여러 요소들을 한눈에 파악해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원어 성경을 그렇게 알아야 한다. 부분에 치우친 채 아무리 심오하게 해석한다 해도 아무 것도 아니다. 히브리어주의로 헬라어를 보았다간 빗나간다. 헬라어주의로 히브리어를 다루다간 빗나간다. 두 언어를 어울리도록 하나로서 묶어서 소화해야만 정통이다. 성경해석에 나타난 섭리이기에 두 언어로 계시를 베푸셨으니 성경 안에서 철두철미 해석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말이다. 독어나 불어나 영어로 성경 해석 하는 게 아니다. 우리말로써 펼치기에 우리말이 어떤 말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이것을 지나치면 사대주의 성경관에 머문다.

한글전용이란 참 야릇한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글”에 대한 뜻매김조차 없다. 당연히 훈민정음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1927년 이후 본격으로 나타난 말이다. 해방과 6.25 거치면서 대일항쟁기인 일제치하에서 빗나간 우리말글이 그대로 성경 번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이것을 자각하는 사람이 적다. 그 바람에 우리 한자조차 망가져서 가뜩이나 중국한자에 물들었는데 일본한자가 더해졌으니 우리말 성경을 보면 이런 면에서도 심각하다. 딴나라 말글이 들어오는데도 모르면 어찌 되겠는가? 소리와 글자로 그 나라의 사상과 문화에 물든다. 아무리 날뛰어야 줏대를 상실한다. 이것을 성경해석에서 꼭 알아야만 한다.
1887년에 펴낸 예수셩교젼셔와 1911년 구역한글판이 우리말에서 전혀 다르다. 만주쪽과 반도쪽에서 한 세대 동안 전혀 다른 언어로 돌변했다. 서구 문법을 도입해 각색했고 자팬음에 맞추어서 우리 혀가 잘렸다. 한글맞춤법에 따라서 성경도 손질한다. 원래 문법이 필요없는 우리말인데 갈수록 문법이 복잡해진다. 여기에 한자전폐론 까지 등장하여 그나마 한글과 단절되었다. 일반은총으로서 언어학이론이 성경 해석에 미치는 영향을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 우리 언어를 상실하니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사대주의란 필연이다. 성경 번역과 성경 해석에 나타난 우리 언어관을 주목해야 한다. 훈민정음을 제대로 받아서 원어도 마련해야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리종연 목사 (서울진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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