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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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2-07 21:0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교회개혁론』 저자와의 특별대담_03


<한국크리스천신문>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미완의 16세기 종교개혁이 성경 진리에 확고한 토대를 두고 완성으로 매듭이 지어져가는 제2의 종교개혁운 동을 소원하며 특별대담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번 특별대담은 2017년 1월 31일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과 배윤리(화요성경공개강좌 사회담당) 권사가 대담자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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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개혁론』에서 개신교 교회의 교사는 봉사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봉사자가 아니라 귀족 대우를 받는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귀족화로 인한 심한 폐해가 무엇입니까?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가장 큰 문제는 교황권위였습니다. 반(反)교회적 교황권위를 성경권위로 개혁한 것이 종교개혁의 핵심입니다. 은사의 직임은 모두 봉사이며 성도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의 은사 역시 마땅히 봉사입니다. 본래 봉사는 원어상 ‘제사’, ‘예배’, ‘희생’을 의미합니다. 산제사로서 영적 예배(롬 12:1)는 봉사와 희생으로 실현되는데, 목사직만 특별히 구별해 구교(舊敎)로 퇴행하고 있습니다. 소위 목사인 봉사자의 지위가 금전적인 최고 수혜자로 변질했습니다. 이런 특별한 대우로 일반 대중의 응집력을 유도하여 성경을 모르는 수준이 낮은 자들을 끌어모아 군림하는 행위로 이어집니다. 성경권위보다 희생과 봉사자의 권위가 더 높은 대우를 받는 딱한 현실이 바로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지위고하(地位高下)나 행위여하(行爲如何)를 막론하고 성경권위를 따르지 않으면 교황의 자리로 가게 됩니다.

2. 같은 책에서 개신교 교사의 귀족화 현상을 로마 가톨릭의 이층 교회관의 잔재로 지적하면서 이 현상은 중세시대의 성직 매매에 해당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현 신학교의 교육제도를 성직 매매의 온상으로 봐도 됩니까?

이층 교회관은 로마가톨릭이 교인을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하여 천 년 이상 고착화시킨 악습입니다. 성경을 모르면 이러한 이층 교회관은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대중을 이끄는 종교지도자를 보면서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는데, ‘영성’이라는 말을 특별히 포장하여 미숙한 대중을 통솔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권위에 역행하는 행태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층 교회관에서 보면 성직(聖職)은 너무 편안하고 좋은 직업이며 항상 유혹하는 직장입니다. 이것을 악용하여 돈을 받고 자격증을 주면서 귀족을 만들어 주는 제도가 발생한 것입니다. 중세교회는 노골적으로 돈을 주고받으면서 성직을 매매했지만, 지금은 교묘하게 세상 교육제도에 편승하여 매매를 합리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권위가 교회에서 올바르게 전승된다면 신학교는 따로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가 바로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므로 성경 교사는 선배와 후배들의 희생과 보상을 통해 양육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교회가 성경권위를 지키고 진리를 전승하는 올바른 교회 구실을 하지 못한 결과가 그릇된 신학교를 양산하여 돈을 주고받아야 교육이 이루어지는 세상의 교육제도에 의해 타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3. 그렇다면 세상 교육제도의 폐습을 따라 귀족화를 야기하고 있는 신학교육의 대안이 무엇이며, 올바른 성경 교사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밟을 수 있습니까?

대안은 교회교육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정과 교회에서 가르치면 점차 신학교육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가정교회’와 ‘교회학교’에서 착실하게 교육받은 자들이 받은 은사를 따라 진리를 전승하고 말씀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당장 실천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수많은 신학교 재단들이 신학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큰 이득을 취하고 있는 폐해를 지적하고 있지만 이것을 개혁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모두 폐기하기는 매우 어려운 현실임을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분명히 실천 가능한 것은 가정교회와 교회학교에서 수준별로 눈높이에 맞도록 성경교사를 양육해 간다면 머지않은 시간에 신학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성경 교사의 양육을 ‘신학의 대중화’ 운동과 직접 관련된다고 봅니다. 저는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총 20권, 진리의말씀사)을 한국 교계에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진리의 대중화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속한 ‘기독교지도자협의회’ 산하 많은 교회에서 그 모델을 보고 있습니다. 분명히 가능한 운동이라고 확신합니다.
더 추가한다면, 무엇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된 성경진리의 교육을 통해서 성경권위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는 신학교가 거의 없는 한국 교계의 지금 상황이야말로 필사적으로 가정교회와 교회학교에서 성경진리를 확인해 주고 가르쳐야 하는 시기라고 봅니다. 현재 신학교육을 받고 있는 신대원 학생들은 매우 중요한 과도기로 비교신학을 하는 태도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경권위를 회복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순수한 봉사자로서 교회학교 교사가 되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4. 교회에서 높은 신분의 귀족 대우를 받는 것이 교주로 타락하고 부패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고 볼 때, 현재 개신교 담임목사제 역시 교주를 양산하고 있다고 봐도 됩니까?

교주(敎主)라는 말은 중세 로마가톨릭의 신부와 주교 그리고 교황으로 이어지는 부패한 제도의 산물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 개신교가 이것을 답습하여 실제로 당회장인 목사가 교회의 주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담임목사 제도에서 강단권, 인사권, 재정권, 의결권을 담임목사가 모두 장악하고 있는 현재의 실태가 바로 교주 노릇을 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또한 담임목사 제도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주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베뢰아 교인들처럼 철저하게 확인하여 깨달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성도의 한 사람이 목사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행정과 운영을 결정하는 담임목사 제도는 반드시 철폐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주화의 악순환을 반복하게 하는 담임목사 제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다만 받은 은사대로 진리를 가르치고 전하는 일에 전념하기만 해야 합니다. 모든 은사를 총괄적으로 지배하는 특별한 권위를 가진 은사란 교회에서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경권위를 깨닫고 성실하게 가르치는 자가 교회 교사입니다. 목사라는 직업이 세상적으로 좋아 보이는 귀족의 신분 사회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성직(聖職)이라 하며 신학교를 통해 사고파는 매매 행위는 반드시 근절되어야 합니다. 

5. 저서에서 강조하신 ‘깨어진 질그릇 조각’인 봉사자로서 교회 교사의 참뜻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깨어진 질그릇으로서 봉사자’란 뜻은 자신을 우선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서 철저하게 인식하는 자며, 그런 자신에게 보화 중의 보화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총을 주셨음을 깨닫는 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봉사자는 자신의 명성과 이익은 철저히 경계하면서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자신을 통해 전해지길 원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유일한 가치는 오직 질그릇과 같은 자신에게 담긴 보화(고후 4:7)인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속에 보화인 진리가 없다면 당연히 성경권위보다 자신을 과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께서는 바울 사도를 만물의 찌끼(고전 4:13)와 죄인 중 괴수(딤전 1:15)로 낮추셔서 오직 진리의 말씀만 증거하게 하셨다고 확신합니다. 이처럼 진정한 성경권위 앞에 서는 진리의 봉사자라면 만물의 찌끼와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에게 진리의 보화가 담겨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에만 오직 몰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교사가 보화가 담긴 질그릇의 비밀을 모른다면 아무리 성경권위를 강조한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입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이 없다(요이 1:4)고 하는 사도 요한의 가르침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진리와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기쁜 것이 없는 것이 깨어진 질그릇 조각으로서 바른 봉사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6. 현재 개신교의 성경 교사와 성도 모두 무의식 중에 너무 쉽게 종교 지도자를 우상화하고 있습니다. 이 답답하고 딱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봉사자로 교회 지도자가 진리의 핵심을 가르치지 않으면 당연히 자신을 높이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자신을 우상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성경중심의 바른 지도자는 성도들을 오직 그리스도에게 중매하는 일(고후 11:2)에서 끝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전부임을 빨리 가르쳐서 오히려 성도들로 자신과의 인간적인 친분은 멀어지게 하고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게 더욱 가깝게 해 줘야 합니다. 성경 진리를 가르쳐주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은 외형부터 별스럽게 치장하고 성도들이 자신을 우상화하도록 조장합니다. 이것 또한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를 목사가 빼앗는 중범죄가 횡행하고 있는 우리 교계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외형과 외모에 얽매여서 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우상화합니다. 그러한 우상화는 반드시 맹종과 맹신의 악순환을 야기합니다. 더욱 개탄스러운 사실은 우매한 성도들이 성경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을 올바른 목사의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데, 학벌이나 사회적 경력 혹은 교회 규모를 기준으로 서로 자기 교회 목사가 더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진리에 대한 정확한 교육으로 내적 성숙을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은 더 극성을 부릴 것입니다.


7. 그런데 교회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것과 바른 성경 교사를 존경하는 것은 어떻게 다릅니까?

성경 교사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즉 가르치는 자가 전하는 진리 그 자체의 내용에 대해 귀하게 여기며 무례히 행치 않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것은 존경심으로 드러날 수 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이 경계를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서 서로 진리의 내용에 전폭 의지하지 않으면 우상화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인간적인 관계를 경계하면서 성경 교사가 가르친 바가 성경에 부합하는지를 철저하게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받은 대로 서로서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본이 되는 삶을 성경의 원리대로 추구하는지도 면밀히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것이 단지 도덕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진리와 함께 기뻐’할(고전 13:6)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핵심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칙을 망각하면 인간적 친분 관계로, 다시 지도자는 교주화 되고 성도들은 맹신하고 맹종하는 악순환을 만들게 됩니다. 진리를 전하는 사람으로부터 자랑을 듣는 것이 우상화의 첫 단추가 된다는 중대한 사실을 꼭 명심했으면 합니다. 

8. 저자는 어떤 강의에서 유치부 학생들이 저자를 보고 ‘교회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성도들이 저자의 출근 승용차만 봐도 안심이 된다고 하는 말에 많이 놀랐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우상화를 경계하고 있다는 말로 봐도 되겠습니까?
네, 많이 놀랐습니다. 어린 아이들 눈에 마저도 벌써 교회지도자가 자연스럽게 우상화되고 있다는 것을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교회 목사의 승용차를 보면 든든하다고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지도자를 우상화한다는 것은 정말 정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후 더욱 어떤 행동이 우상화의 빌미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경계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상화될 바에야 차라리 수모를 당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교회 지도자가 우상화의 빌미를 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중대한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자칫하면 동역하자고 하는 제안이 자신을 우상화하라는 결과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산 성도를 이용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적그리스도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이것을 수백 번을 경계해도 절대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교인들에게 ‘협력하자’고 하지 않습니다. ‘합력하자’고 권면합니다. 협력은 목사가 하는 일에 종노릇하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각자 받은 은사대로 성경께서 주신 분량대로 ‘합력’할 뿐입니다.

9. 그릇된 개신교 목사의 비성경적 설교는 목사를 평생토록 물질로 섬기도록 제도화하는 폐해를 낳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만큼 ‘성령의 교통하심’을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행위가 된다고 판단하십니까?

봉사자로서 교회 교사의 사명을 망각하면 인위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귀족화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외형적 제도를 점점 규격화하는 것은 발전이 아니라 타락이며 부패입니다. 교회제도 자체가 이것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지도자의 생계를 안전하게 보장해 줘야 지도자는 많은 사람을 끌어 모읍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성장만 하면 된다는 것은 정말로 성령의 교통하심을 차단하고 보혜사를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연보를 제도화하고 의무화하여 그것을 목사의 성과급으로 대거 몰아주는 것은 비성경적인 인위적 제도입니다. 특히 연보를 제도화해 놓고 있는 한국 교회의 상황이야말로 성령의 교통하심을 거역하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10. 바른 성경 교사가 되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신앙의 선배로서 꼭 해주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성경 교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가질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가 너무 좋아서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가짐입니다. 세상 물질은 남에게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무한히 나누고 싶다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형제를 사귀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 그것 하나만 생각하는 것이 성경 교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지식 자랑하고 그래서 이득을 취하겠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장사꾼 심보입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설교 준비를 하는 동기가 성도를 가르치면서 그 위에 군림하기 위한 것이라면 보상을 계산하는 장사꾼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무 좋은 진리를 은혜로 받아서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전부이어야 합니다. 저는 성도들이 ‘성경 진리가 너무 좋다’는 말이 가장 기쁩니다.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이 끝나야 합니다. 성경 교사는 특히 자신이 인기를 얻을 때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을 때 그 순간이 바로 ‘장사꾼’으로 전락하는 위기의 순간이 됩니다. 남들이 인정하고 존경한다고 할 때 자기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왜 자신이 성경 교사가 되었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교통하심에 따른 봉사자로서의 성경 교사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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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로고스의 운동력과 소피아의 이동
원어 성경과 성경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