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17-03-20 19:2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로고스의 운동력과 소피아의 이동


둘. 말씀운동의 역사와 악의 섭리,
중세 교황권의 부패



3.  ‘음녀 바벨론’ 확산의 상징들: 교구의 고딕 성당


3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계 17:3~6)

서유럽 문화 유적지를 여행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평지를 지나다 보면 멀리 성당 십자가가 나타난다. 그곳으로 가면 여행이 시작된다. 그곳에 도착해 입구를 지나 중심부로 들어가면 좀 전에 보았던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있고, 이제는 고개를 뒤로 젖혀야 성당 탑이나 첨탑을 볼 수 있다. 그 성당 건물은 반드시 광장을 가지고 있고 맞은 편 혹은 인근에 시청 건물이 있다. 광장은 그 마을이나 도시의 모든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생활의 중심 무대다. 현재도 곳곳에 남아 있는 이러한 흔적들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통치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중세 봉건제 하에서 마을의 영주들은 토지를 확장하고 부를 축척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교회를 이용하였고 동시에 종교 권력도 세상 권력을 사용하여 자신의 영달을 도모했다. 수도원 중심의 중세 로마 가톨릭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봉건제로 마을 단위로 성장한 경제력은 수도사들을 마을로 불러들이게 된다. 그래서 봉건 영주와 교구 주교가 합작한 교구관료제가 1,000여 년 동안(4세기~14세기) 향후 종교개혁까지 그리고 그 이후 유럽 문화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교구관료제에서 왕과 귀족들에게 당시 귀족 교육을 받은 주교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주교는 행정력을 위임받으면서 영주 관할 내의 종교, 교육, 행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교가 로마 가톨릭이고 영주의 임명권은 종교 권력의 승인을 받아야 했으므로 왕과 귀족들 그리고 영주에게도 주교는 어쨌든 매우 중요한 권력 유지의 동반자였다. 그래서 세속 권력자들은 유능한 주교를 스카우트했다. 그 결과 관할 지역의 행정제도의 효율성이 증대했다. 마을의 주교들은 교황의 명령을 받기도 해야 하고 통치자들의 요구에도 부응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마을에 소속한 환경 때문에 주교들은 종교적 지도자라는 고유성은 상실해 갔으며 일상의 생활세계에 더 친숙해졌다. 이러한 환경은 종교지도자들이 세속화로 향하는 거부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교황은 형식적으로나마 세속 국가 위에 군림하는 자신의 최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주교들에게 세속과 구별되는 영적 지도자이길 원했다. 하지만 처한 현실은 종교적 명분보다는 교황권을 이용해 세속 권력과 결탁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중세 말기로 갈수록 더욱 증가했다. 이러한 교권과 행정권을 모두 쥔 주교의 위치와 역할은 백성과 화합보다는 긴장과 갈등, 대립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시기에 백성들에게 마을 주교들이 외면을 당하고 공격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그 흔적을 유럽의 대부분 마을에서 ‘고딕 성당-시청건물-시장 광장 세트’라는 부패하고 몰락해 갔던 로마 가톨릭의 흔적을 지금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주교가 가졌던 반박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 바로 대성당 건축이었다. 마을의 대성당 이전에는 주로 세속과 분리된 웅장한 수도원이 종교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발전하는 봉건주의라는 환경은 이제 도시와 마을에서 주교의 권한이 얼마만큼 강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일이 대성당 건축과 관련해서 진행되었다. 7세기 말부터 9세기 말까지 서방의 로마 가톨릭이 지배했던 서유럽 제국의 왕조를 우리는 ‘칼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라고 한다. ‘칼 대제’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이 왕조는, 프랑크 왕국의 세습직 관리인인 궁재(宮宰)직이던 피핀 2세가 유명무실한 메로빙거 왕조를 무력화시키고 687년 서유럽 프랑크 왕국(현재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전체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면서 부상했다. 그 후 ‘샤를마뉴(칼) 대제’로 알려진 카를 1세는 다시 제국을 통일했다. 그는 교황과 동맹을 맺었으며 800년도 성탄절, 교황 레오 3세가 참석한 가운데 ‘부활한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 후 843년 베르뎅 조약에서 서쪽의 서프랑크(프랑스)는 카를 1세의 손자인 대머리왕 샤를에게, 동쪽의 동프랑크(독일)는 또 다른 손자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이탈리아 지방과 로마를 포함한 중프랑크는 다른 손자 로타르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9세기 노르만족과 색슨족과 같은 신흥세력의 부상과 함께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는 점점 약해졌으며 9세기 말(887년) 카롤링거 왕조의 세력이 거의 와해되었다.

우리는 서유럽을 방문하면서 이내 이 왕조와 함께 종교권력과 세속권력의 공모관계를 아직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성당 건축물은 이제 세속 정부 내에서 주교들의 권한을 행사하는 중심 무대가 되었다. 교구 중심에 세운 성당은 종교와 권력의 중심이었으므로 ‘중심교회(mother church)’라는 권위를 얻는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 전우주적 지배자가 되듯이 중세 시대의 번성은 바로 모든 마을에 주교가 소(小)교황의 역할을 행사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경제의 급성장은 고딕성당 건축의 경쟁을 더욱 가속화했다. 11~13세기를 ‘대성당 시대’라고 칭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거대한 수도원과 비교할 수 없이 높게 세우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의 고딕성당은 ‘바벨탑의 유럽적 확대 재생산의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온 마을을 모두 ‘교구중심교회’를 통해 통제하면서 로마 교황청뿐 아니라 전유럽이 부패했던 상징을 우리는 아직도 유럽의 구시가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도원과 교구 성당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건축가들은 바벨탑처럼 붕괴되지 않고 하늘에 도달하려는 건축공학을 발전시켰다. 15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양식을 ‘고딕(Gothic)’이라고 명명했다. 고딕 양식의 중요한 특징은 중세를 ‘암흑 시대’로 규정한 것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고딕성당 안에 들어가면 빛으로 가득하다. 종교적 진리를 물리적인 빛의 성질과 일치시키기 위해 고딕 성당의 창문은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색했다. 그 이전에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전달하는 방법은 유치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스테인드글라스는 종교권력자들에게 매우 탁월한 방법이었다.

고딕 성당의 교회 탑과 첨탑은 지상에 존재하는 교권의 상징 자체였다. 궁궐의 어떤 탑도 성당의 탑보다 더 높이 올릴 수 없다. 맥클로흐는 이렇게 정리한다. 당시 “고딕양식의 보편성은 그레고리우스 7세의 격동적인 재임 기간 이후, 단일한 가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비전이 서방교회를 사로잡았던 한 징후였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스칸디나비아부터 스페인까지 확산했다. (당시 대표적인 건축물이 아직도 웅장한 모습인 샤르트르 대성당과 생드니 대성당이다.) 이렇게 고딕 양식은 교만과 반역의 상징인 바벨탑의 유럽적 확산의 부정할 수 없는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전 유럽에 이 바벨탑의 부활인 고딕성당을 더욱 확산시키는 커다란 대사건 하나가 발발해 200년 동안 계속된다.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140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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