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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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13 19:2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교회개혁론』 저자와의 특별대담_08


<한국크리스천신문>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미완의 16세기 종교개혁이 성경 진리에 확고한 토대를 두고 완성으로 매듭이 지어져가는 제2의 종교개혁운동을 소원하며 특별대담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번 특별대담은 2017년 6월 7일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과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대담자로 참여하였다.

1. 개신교의 부패한 모습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께서는 서구 개혁파 교회가 성경 말씀을 교회의 유일한 지표로 삼지 않고 로마 가톨릭의 세례와 성찬을 수용한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나아가 개신교 안에 로마 가톨릭의 ‘일곱 성례’가 거의 복원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허례허식의 폐해를 설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황 권위에 맞서 ‘성경 권위’를 수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천 년 동안 굳어졌던 로마 가톨릭의 구습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고 봅니다. 올바른 종교행위, 즉 성경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교회 생활을 로마 가톨릭의 ‘미사(missa)’와 같은 폐습을 여전히 모방한 것입니다. 이것이 개신교의 치명적 오류라고 봅니다. 결국 이러한 미흡한 개혁은 개혁교회를 다시 혼돈 속으로 빠뜨렸습니다. 교회당을 ‘성전(聖殿)’이라고 하며, 가톨릭의 의식을 닮아서 목사를 제사장이나 중보자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죽으시면서 구약의 모든 성전 제사를 폐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과 함께 성전의 휘장은 찢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불탄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 권위, 만인제사장 그리고 이신득의(以信得義)을 외쳤으나 성경 권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서 개혁은 후퇴하고 있습니다. 교황권위 대신 목사의 권위로 바뀌었고, 사제(司祭)주의 대신 목사를 제사장으로 둔갑시켰으며, 공로주의는 행위 구원으로 옷을 바꿔 입었습니다. 의식 중심의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교의 임재설이 기념설로 명칭만 바뀌었을 뿐 교회당은 점점 로마 가톨릭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의식(儀式)에 빠지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2. 개신교 목사들이 예전(禮典)을 통해 성도들의 종교심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른바 ‘성의(聖衣)’를 입고, 예배를 의식 절차로 만들어 마치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신앙의 원로로서 이러한 한국 교회의 부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과연 회복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종교개혁은 세계사의 엄청난 사건이라고 봅니다. 가령 16세기 후반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의 미흡한 개혁을 더욱 추진하고자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 간 사람들을 ‘청교도(puritan)’라고 합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의 측면에서 여전히 로마 가톨릭을 따랐던 성공회의 제복 문화나 예전(禮典) 중심의 폐습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잘 아시는 것처럼 청교도는 의식 중심의 성당을 지은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 곧 ‘교회=학교’라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 이 전통은 ‘성경 권위’를 확립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재 흐지부지되고 있으며 세속화되고 있습니다. 미흡했던 청교도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 바로 ‘성경 권위’를 확증한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이라고 봅니다.
한국 교회사에서도 성경 권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이에 어려웠던 시절, 즉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의 와중에 통일교, 전도관 등 이단들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민도(民度)가 낮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이단이나 그릇된 목사들의 가르침에 속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목사들은 교주(敎主)가 되었고, 하나님의 전권대사가 되었고, 제사장으로 둔갑했습니다. 이북에서 월남한 목사님들이 처음에는 성경 중심으로 목회를 했지만, 남한의 경제 발전이 가속화하면서 교회의 세속화는 급물살을 타고 성경 권위를 집어삼켰습니다. 교회의 양적 부흥이 교회 성공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교회당을 성전으로 둔갑시켜 전국이 연일 ‘헌당식’ 행사로 바빠졌고, 목사들은 어떻게 하면 성도들과는 구별되는 더 그럴싸한 제사장이 될 수 있을지 꼼수를 부리게 되었습니다. 건축위원장이 입당식을 하면서 친구 목사한테  ‘천국 열쇠’라며 목에 걸어주는 것을 보고 경악해서 그냥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 교회 부패 원인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봅니다. 
한국 교회가 성경교육을 등한시하면서 ‘이단의 못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 권위 회복이 아니면 대안이 없습니다. 다시 호소하고 싶습니다. 이단에 속고, 율법주의에 억압당하고, 그릇된 목사들에게 고통당하는 한국 교회 성도들이 우리 ‘기독교지도자협의회(www.tbtlm.kr)’에 들어와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한 ‘성경신학’으로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집필한 『교회개혁론』의 핵심은 성경만 제대로 가르치면 정치체제나 종교행위는 따로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성경대로 서 있으면 아름다운 기독교 문화와 올바른 체제가 자연스럽게 수립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3. 개신교 교회당 안에서 형식적인 의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의 권위를 농락하는 이러한 부패는 어느 정도 상식 있는 상당수의 목사나 신학자는 알고 있을 텐데 이러한 교회 타락과 부패에 대해 전면적 개혁을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그 대안은 무엇입니까?


원인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대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의식 있는 대부분의 개신교 지도자나 성도들은 교회가 분명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문제는 성경적 대안에 관심이 있느냐, 있다면 그 대안이 무엇인지 밝혀 제시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얼마 전, 신학교에서 저를 가르쳤던 은사를 만났습니다. 그 분이 한국 교회 개혁을 강조하셔서 제가 “왜 현직에 계실 때 그렇게 주장하지 못하셨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교단이라는 큰 세력과 교권주의자들의 압력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대답하셨습니다. 진리에 대한 확증 그리고 그 확증된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교회 개혁은 일어나기 힘들다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베뢰아 성도들처럼 성도 개개인이 스스로 성경 진리를 확인하는 운동이 확산되지 않으면, 교회 개혁은 힘들다고 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집 밖의 교회 세운다고 ‘가정교회’를 붕괴시켰습니다. 교회 개혁의 대안은 바로 ‘가정교회’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가나안을 바라보게 하시면서 부모의 마땅한 도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 여호와를 가르치는 것임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대안은 바로 우리 가정에 허락하신 ‘가정교회’에 있음을 꼭 명심하길 바랍니다. 

4. 개신교의 기복주의적이며 미신적인 종교 의식 행위는 놀랍게도 교회 헌법이 조장하고 있습니다. 헌법이 성도의 권리를 깨닫게 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속이고 성도들을 무지몽매하게 하는 면이 훨씬 더 많다고 봅니다. 신앙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입교와 함께 성도들을 평생토록 맹종하게 하는 교회 헌법은 반드시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 헌법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헌법을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의 법인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에서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의 교회 운용 방식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성경 권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일한 법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신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진리의 법을 제쳐두고 세상처럼 따로 법을 만들어 성도들과 교회를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정치를 흉내 냈던 로마 가톨릭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의 법은 세상의 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영원한 나라’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우셨으며 동시에 모세 시대부터 탁월한 법으로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섭리해 오셨습니다. 구약의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이 망쳐놓은 구약의 법을 재해석하며 천국에 맞는 올바른 법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으며, 승천하시며 약속하신 성령이 오셔서 신약을 완성케 하여 ‘천국의 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제가 볼 때 종교개혁자들은 인위적인 법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성경 권위를 확증하여 성경 진리를 올바르게 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후예들은 다시 로마 가톨릭의 세속적인 법을 모방하는 개탄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봅니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 요시야 왕의 ‘말씀에 의한 통치 회복’의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그 회복의 기쁨이 있길 고대합니다.

5. 개신교 지도자들 중에는 이단을 경계한다는 미명 아래, 이른바 ‘이단 프레임’으로 다른 교회로 가거나 목사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목사의 이러한 행태는 자신의 권한을 ‘신권’으로 속여야 가능합니다. 이렇게 성도의 고귀한 자유가 통제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왜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짐승 권세에게 맡기신 이 세상에 속한 인간 영혼은 근본적으로 인간 중심적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성경과 대조해서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세상을 이끄는 원리는 ‘상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를 갖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도 성경이 아닌 상식 수준에서 접근하면 모두 쉽게 받아들입니다. 바로 로마 가톨릭이 이러한 상식을 철저하게 이용하여 성경 진리를 덮어버리고 있는 대표적인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한국 교회 체제에서 세속적인 상식을 극복하고 성경 진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며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하므로 상식적인 인간의 말에 속게 되고 미혹당합니다. 가령 예를 들면 내가 겪었던 경험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을 진리로 가르칠 실력도 없고 진리에 대한 관심도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목회를 ‘직업’으로 선택하고, 목회가 ‘생업’이 되면서 성경 진리도 금방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를 개혁하고자 했을 때는 진리로 엮어진 스승과 제자의 관계, 혹은 진리의 동역자 관계는 헌신짝처럼 버려졌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올바른 진리라고 하더라도 결코 인간이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교회개혁론은 특별히 누군가를 타깃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단지 성경 진리를 ‘성경신학’을 통해 확증해 주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하며 받은 바 성경 권위 수립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어떤 인위적 집단이나 인간적 제도, 눈을 속이는 의식도 철저하게 경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 많은 기독교 원로들이 한국 개신교를 중세 로마 가톨릭보다 더 부패했다고 비판합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의 무지와 맹종,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 교회들의 방탕과 방종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사적 관점에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한국 교회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왜 섭리하십니까? 오직 성경만 하나님 말씀이라는 성경 권위를 확증하신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의 주창자이기도 하신 저자께서는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한국 교회의 무지한 성도들에 대해 어떤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끼십니까?     


하나님께서 언약 자손들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닫게 하시는 중요한 방법적 원리가 있습니다. 바로 곤고한 날과 형통한 날을 반복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이후에 주신 광야시대, 그리고 가나안 정복 후 사사시대를 봅시다. 어떤 때는 형통케 하시고 또 다른 때는 곤고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반복하시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했다고 해서 모두 지옥으로 가고 있다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라고 그러한 상황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통절히 깨닫게 하시려는 보혜사 성령의 놀라운 섭리 방법입니다. 사사시대처럼 고난 후에 회개하고 뉘우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의 개혁파 교회 안에서도 부패하는 교회, 진리를 부정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특히 개혁파 교회를 잠식하는 문서설자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현대 신학의 철학적 꼼수들이 흥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격랑의 파도 속에 우리를 두시고 우리에게 성경만 하나님 말씀임을 확증하게 하신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을 무한하신 은혜로 주셨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사명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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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로고스의 운동력과 소피아의 대이동
계시 언어들의 관계와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