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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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2-12 19:3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과연 무엇이 다른가?


미국 종교학자 리처드 호슬리는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난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된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다.”고 했다. 호슬리의 이 말은 ‘기독교가 제국이 되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 교회들을 보면 호슬리의 이 말을 실감하게 된다. 성직자들은 진리를 지키기 위한 순교보다 진리가 현시되지 않은 세상에서 번영을 선택했다. 번영신학의 뿌리는 5세기부터 시작했고, 교회 성장주의는 번영을 선택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빙자하고, 성장과 번영이 하나님이 함께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개신교의 개교회주의는 결국 복음의 자유가 아니라 성직자들이 자기 성취·성장·업적을 위한 영역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추앙받는 소위 성공한 목사들을 보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빙자하고, 성장과 번영이 하나님이 함께하는 증거로 착각하는 것 같다. 개신교의 개교회주의는 결국 복음의 자유가 아니라 성직자들이 자기성취· 자기성장·자기업적을 위한 영역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쓰는 것 같다.

리처드 니버는 아이러니하게도 교파주의의 연원을 살펴보면서 “기독교는 창시자의 뜻보다 경제적 이해관계에 더 많이 영향을 받아 왔다”고 결론을 내린다. 니버의 평가는 지금의 한국교회에도 유효한 것 같다. 최근 어느 신문에 “이순자와 기독교”라는 글이 실렸다. 너무 엉뚱한 제목이어서 읽어 보았더니 한국교회 환부의 뿌리를 그야말로 후벼 파는 내용들이다. 한국교회가 이런 글에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돌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순자 씨가 “자기 남편 전두환 씨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나 “온갖 탐욕의 노예가 된 대형 교회의 목사들을 위대하다, 성공한 목회자다 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하는 얘기다. 이 글의 중심에 실례로 나와 있는 분들에 대한 표현을 들어 보자. “세계 최고의 대형 교회를 이룬 모 목사는 대법원에서 실형을 받았다. 교회 돈 131억을 장남과 함께 배임한 것이 드러나 징역형을 받았지만, 법관들의 도움을 받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는 세상 법정에서 실형을 받았지만, 교회에서는 여전히 영웅이다. 법과 상식, 도덕이 그의 교회를 통제할 수 없다. 재판을 받기 이전에 은퇴한 그는 교회에서 은퇴비 200억 원을 받았다. 특수 선교비로 600억 원 이상을 여러 차례 나누어 수령하기도 했다. 모 목사는 여전히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하고 있고 다양한 집회를 인도한다. 그의 아내는 그의 교회가 세운 대학 총장이고, 아들은 그의 교회가 세운 신문사 이사장이다. 이들에게 은퇴는 없다. 서대문 빈촌에서 시작한 그의 삶은 수천억 원대의 축복(?)을 받은 산 증인이 되었다. 기독교가 그에게 준 선물이다. 대형 교회 목사들이 그를 ‘호형’하며 그의 사례를 뒤따르고 있다. 이들의 세계에서는 법과 윤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치외법권’, ‘치외도덕권’이 따로 없다.” 또 다른 모 목사가 아들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줬다는 것도 언급한다. “한국교회 모순은 ‘하나님이 성직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성직자가 곧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목회 세습을 하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런 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곧 “담임목사의 교회”, 담임목사의 교회가 그의 자식의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선교를 빙자하고, 성장과 번영이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창시자의 뜻보다 경제적 이해관계에 더 많이 영향을 받아 왔다”고 결론 내린 니버의 평가는 지금도 유효하다. 강단에서 주장하는 왕 중의 왕, 창조주, 영광의 신학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너무나 쉽게 동조됐다. 제국주의를 향한 칭송과 권력 지향성, 그리고 자기 교회의 세력화는 동의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성직자들의 무의식을 지배해 온 사상이다. 하나님이 강자의 하나님, 제국주의와 함께하는 하나님이 된 것이다.

대형 교회는 무한한 탐욕에 지배를 받고, 탐욕스럽게 모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대부분 포장용이다. 실제로는 성직자의 욕망 덩어리가 되어 너무나 쉽게 사유화되고 세습되고 있다. 이제는 성직자 개인이나 가족이 독점하는 종교 기업이 된 것이다. 누구도 통제하기 어렵다. 교단의 세력은 대형 교회의 돈과 지배력의 도움을 받아야 존립할 수 있다. 탐욕과 권력 숭배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유와 해방은 요원하다. 하나님을 권력화하는 이는 그것을 통해 자기 권력을 확장한다. 대형 교회를 일구어 온 1세대 목사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그의 일에 열심히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고 간증한다. 그들 자식도 하나님 신앙을 말하고, 그의 아비를 일러 ‘하나님의 종’이라 여길 것이다. 그들의 아내도 “내 남편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는 마치 이순자가 ‘군부를 동원해 정권을 장악하고, 광주 학살의 배후’였던 자기 남편을 일러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전두환을 지키겠다는 무리가 있듯이, 대형 교회 목사 뒤에는 호위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성직자의 욕망을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법과 윤리의 사각지대가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성직자의 욕망을 충실하게 채워 주려는 시종과 신하들이 있다. 마치 로마제국의 황제에게도 시종과 신하들이 있었듯이. 전두환과 이순자만 딴 나라 사람이 아니다. 탐욕으로 얼룩진 한국교회를 옹위하는 사람들도 딴 나라 사람들이다. 욕망의 노예가 된 교회가 자신을 자화자찬한다면 그것은 이순자의 화법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전두환이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니…. 모 목사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라니…. 그 뒤를 이어 호명할 사람이 너무 많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견해를 따라 본다면 “횡령하고 실형을 받은 목사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면 나는 무신론자가 되어야 참된 신자다. 목회 세습을 한 목사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믿지 않겠다고 해야 참신자다.” 이러한 의미로 블로흐는 기독교 안의 무신론을 언급했다. “예수는 모 목사의 하나님을 믿을까?” 권력 종교! 그것은 예수가 가르치지 않은 길이다.

이순자를 보면서 어이없어하는 그대, 한국교회를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국교회가 깨어날까? 중세를 뒤엎던 그 개혁의 물결이 한국교회를 휩쓸어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초대교회와 같은, 수가 적고 가난했지만 불굴의 믿음으로 순교를 불사했던 그런 교회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이 시대에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것은 강단의 변화이다. 축복과 번영을 말하며 인간의 부패한 욕망을 자극하는 설교를 지양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한 걸음 한 걸음 우직하게 따라가는 진실한 예수 따름이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이 글은 2019.01.18. 박충구 교수의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효식 목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부총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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