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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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17 19:1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객원기자  오늘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7장 성례(聖禮)’와 ‘제28장 세례(洗禮)’ 그리고 ‘제29장 주의 만찬(晩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백서에서 제시한 의식들은 현재 개혁파 교회에서는 거의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성례로서의 세례와 주의 만찬(성찬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너무도 당연한 종교의식이 되어 있습니다. 목사가 거의 그 절차를 이끌어가고 성도들은 특별한 형식을 통해 이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면 구원에 대한 확신까지 흔들릴 정도로 중요한 절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좌담회를 통해 지금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살펴보면서 확인한 것처럼, 두 성례인 세례와 성찬식은 지금부터 370년 전 제정 당시부터 세례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성경적 교의(敎義)에 너무나 벗어나 있으며 성찬식은 아예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는 이 형식에 대한 성경에 근거한 이의 제기는 거의 없는 상황이며, 미숙한 성도들에게 목사가 있어야만 가능한 목사들의 ‘특권’처럼 남용되고 악용되는 것이 세례식과 성찬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취재 기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한국 교회가 세례와 성찬으로 이렇게 성경에서 점점 멀어져서 로마 가톨릭인지 개신교인지 구분도 어려워졌고, 이방 종교인지 기독교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워진 지경입니다. 오늘 좌담회를 통해 부패한 개신교의 세례와 성찬에 대한 문제점과 나아가 성경에서 말하는 본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길 바랍니다. 아울러 비성경적인 형식과 제도로 성도들을 속이는 거짓 지도자들을 정확하게 분별하여 무지몽매한 한국 교회 성도들이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는 뜻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P연구생  고백서 제27장에 보면 성례의 근거에 대해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가솔(家率)이 받았던 할례와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받은 믿음으로 의를 인친 할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해 주신 유월절에 양과 쓴 나물과 무교병 먹은 사건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할례 의식은 세례의 근거로, 유월절 음식 먹는 의식은 성찬식의 근거로 보고 있다고 보입니다. 할례 의식이든 유월절 의식이든 모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세례의 근거로 할례는 적합하지 않다고 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핵심인 세례(洗禮)는 신약 성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에 들어가는 것은 육적 몸의 죽음이며, 물에서 나오는 것은 영적 몸의 살아남을 뜻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는 노아 시대 대홍수, 모세 시대 홍해 도하(渡河), 모세의 광야 시대 반석에서 샘물 마심을 신령한 세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모든 구약의 사건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사건에 대한 예표이고 모형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구약의 모든 세계는 완성되었습니다.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지적한다면, 세례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너무도 빈약하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3항에 가면 성례의 효력은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4항에 가면 모두가 엉망진창이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해 놓고 인간과 율법으로 마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헛되게 만드는 말을 합니다. 참담한 고백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적 성례(聖禮)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백문에 보면 ‘합법적으로 안수 받은 말씀의 사역자 이외에 어떤 사람도 성례를 집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대속 사역을 뒤집는 말입니다. ‘안수’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있고, 맥락상 볼 때 ‘합법적인 것’이란 말은 교권(敎權)이 인정하는 자인 목사만 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370년 전 고백서의 성례관은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신부(神父)가 하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37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는 성례 문제에서 로마 가톨릭인지 개혁파 교회인지 구분되지 않고 비성경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봅니다.


개혁파 교회의 성례관은 성경적 근거가 빈약하고 개혁되어야 할 로마 가톨릭의 잔재이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구약의 모세 율법은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입니다(눅 22:44). 할례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모든 제사 의식과 생활의 율례들이 메시야 예표이며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교회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의 사역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의 삶 자체가 ‘거룩한 산 제사이며 영적 예배’(롬 12:1)입니다. 신약교회 시대에 어떤 특정한 형식이나 절차를 강조한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거나 알고도 의도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악의적이고 정욕적이며 우상적 발상이라고 봅니다. 제27장 5항에 보면 구약 성례는 신약 성례와 영적인 뜻으로 보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참으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왜곡하는 말이 됩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 하나님 여호와 계시 기록이며 그 내용은 메시야 언약과 성취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은 모형이며, 신약은 실체적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성취하신 사역은 구약과 비교할 수 없는 차원입니다. 신약 전체 내용을 말하기는 시간과 지면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님의 신분과 사역이 세상 어떤 인물이나 업적과도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제사장의 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적 제사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세상의 차원과는 다른 하늘에 속한 신령한 사역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와 형식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히 9:10)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신약교회 시대에 어떤 특별한 의식을 만든다는 것은 한마디로 비성경적 무지이며 그래도 그것을 조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왜곡하고 성도들을 혹세무민하여 자신들의 교권(敎權) 확보에만 관심이 있는 세상적인 정욕적 발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뜻이 동일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신약시대에도 로마 가톨릭의 칠성례 중에서 목사가 주관하는 것을 남겨두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분리하여 지배와 종속의 종교제도를 유지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나 역시도 목회할 당시 한동안 성례를 시행하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하루라도 일찍 없애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도 합니다.

박홍기 연구원  ‘합법적 안수를 받은 성례 집행자’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보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4:1과 히브리서 5:4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맡은 사도 바울 자신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세례 장면이 여러 곳 나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약속대로 강림하여 예루살렘부터 복음이 전해질 때 신약교회 초기 사역에 주로 세례를 행합니다. 당시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 사역이 예루살렘부터 시작할 것’(눅 24:47)을 증거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한창 전해져 헬라반도와 고린도 지역에 이르면 이방인 성도의 경우에는 세례에 대한 의식은 약화됩니다. 바울 사도 자신의 생애를 보더라도 몇몇 사람에게만 주었고 오히려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다고 평가합니다. 그리스보와 가이오, 스데바나 집 사람 외에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고, 또한 바울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다는 말을 매우 경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 십자가를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이 복음 전파의 본래 목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고전 1:14~17). 그리고 고백서를 보면 히브리서 5:4을 합법적 안수 받는 자의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정말로 370년 전 고백서를 작성한 사람들의 신학과 신앙과 학식을 의심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조금 전 원로께서 히브리서가 어떤 복음이며 왜 신약교회에는 특별한 성례 의식이 없어야 하는지 선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고백서에서 근거로 인용한 구절의 성경적 의미는, ‘믿음의 주되시며 온전한 제사 사역을 완성하신 분‘(히 12:2)은 오직 영원한 제물로서 영원한 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이 구절에 담긴 의미를 알고서도 이것을 성례 집행자인 목사와 의도적으로 연결시키려고 했다면, 이러한 태도는 로마 가톨릭의 사제(司祭)나 신부(神父)나 할 소리이지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문을 만들려는 지도자의 손끝에서 나올 말은 아닙니다. 정말로 눈을 의심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 싶고 이렇게 조야한 고백문이 어떻게 아직도 권위가 통하고 있는지 답답하고 통탄스러울 지경입니다.

K연구생  저는 지금까지 지적하신 부분을 통해 제28장에 나타난 세례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제27장 4항은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자의 자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제28장 1항에 오면 세례를 집행하는 자에 의해 성도들은 유형교회에 가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나간 좌담회에서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구분이 비성경적임을 다루었기 때문에 유형교회에 대한 문제점은 넘어가겠습니다. 고백서에 보면 세례에 대한 근거를 마태복음 28장 19절로 삼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 구절은 성령의 사역으로 사도행전에서 성령세례로 성취되었습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 한 것도 아니며 후에 사도 바울은 오히려 세례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왜곡되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초반에 가면 세례의 의미는 신령한 차원으로 설명되며 그 이후 바울 서신에도 이방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오히려 갈라디아서나 골로새서에 가면 율법적 의식이나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경계하며 비판까지 하고 있습니다. 신약교회 시대에 성령께서는 중생부터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역을 홀로 주관하시면서 성도들을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도하신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세례만 강조하고 더욱이 특별한 사람만 세례를 줄 수 있다는 말은 보혜사 성령의 사역과 성경진리를 왜곡하는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원로가 저술한 『무엇인가 3』에 보면 ‘세례란 무엇인가’라고 나옵니다. 성경적으로 정리를 잘 해주고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죄인을 구원하는 정결의 표상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사역을 하시면서 세상의 모든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세례 자체가 성령의 사역인데 침례를 해야만 하느냐 아니면 손으로 약식(略式)으로 해도 되느냐 나아가 유아세례를 꼭 해야 하느냐 하는 논쟁은 모두 성령께서 세례의 주체이며 주관자이심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어리석은 논쟁입니다. 신약교회 성도들 삶 자체가 성령께서 주시는 세례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결과입니다. 성도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됨을 증거 하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원로의 저서에는 개혁파 교회의 삼대 표지(標識)인 말씀, 성례, 권징이 비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원로는 성례나 권징이 모두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의 결과라고 강조합니다. 세례가 갖는 복음 전파 용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현재 한국 교회가 하는 세례를 보면 본질에서 너무 벗어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우매함이 한국 개혁파 교회를 너무 황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례의 주체와 주관자는 오직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시며, 성도라면 누구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영적 생명입니다. 세상의 어떤 형식과 제도로 훼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백서 제28장 세례의 5항에 보면 세례 예식을 소홀하면 ‘큰 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님을 의식했는지 이 세례 예식에 은혜와 구원이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고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7항에서 세례는 오직 한 번만 베푼다고 했는데, 이것은 목사에 의해 한 번만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세례의 영원한 효력을 강조하는 말이어야 합니다. 


개혁파 교회의 세례관은 보혜사 성령의 영원한 사역을 왜곡하고 있다!


S연구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517년 종교개혁 이후 100여 년이 지나면서 개혁파 교회가 성령론과 교회론의 성경이해에 있어서 맹점을 드러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다시 로마 가톨릭의 의식으로 복귀하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 교회를 보면 이른바 ‘성례(聖禮)’라는 이름으로 세례와 성찬(聖餐)이 얼마나 의식화되고 형식화되어 이방 종교를 따라가고 있는지가 바로 왜곡과 부패의 증거가 됩니다. 성찬도 조금 전에 취급했던 세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누리는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과 관련해서 본다면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들의 애찬(愛餐)’이라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가정교회이든 성도들이 함께하는 교회이든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특별히 어떤 의식만 성찬식이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성도들과 애찬을 나누실 것을 확신하면서 그날을 기다리며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이 거룩한 산 제사로서 성도들의 애찬이라고 봅니다.
저는 특히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개혁파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사용하는 축도 구절입니다. 참으로 너무나 왜곡하여 사용되는 성경구절이라고 봅니다. 주의 만찬에 집중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처럼 삼위 하나님이 함께 등장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성도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교통하심의 헬라어 사본은 ‘코이노니아’로 나와 있습니다. 함께 참여한다는 뜻으로 친교와 교제를 의미하며 연보로 이어지고 함께 즐거운 애찬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신약교회와 연관시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와 연관되는 것이 교제로 번역되는 성령의 교통하심 즉 ‘코이노니아’입니다. 가령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말로만 코이노니아를 했기 때문에 바울 사도의 지적을 받았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올바른 코이노니아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봅니다. 말로는 같은 형제자매라고 하면서 부요한 자들은 자기들만 따로 모여 배를 불리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교회에 와서 더 굶어야 하는 비참한 경우가 고린도교회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성령께서는 바울 사도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교제가 무엇이며 성령의 교통하게 하심은 반드시 애찬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깨닫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애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식이라는 특별한 의식을 만들어 특별한 사람이 구별된 장소에서 하는 것만 개혁파 교회의 성찬식이라고 말하고 행하는 것은 성경의 본래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고백서를 보면 성찬식을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분명히 구분합니다. 성경적인 올바른 판단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7항과 8항에 가면 다시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맥락에서 보면 목사를 중심으로 거행한 성찬이 아니면 합당치 않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린도전서 11:27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봅니다. 앞에서 이미 고린도교회의 합당치 못한 교제에 대해서는 지적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7항과 8항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비판하면서 다시 또 다른 의식과 제도를 만드는 미숙하고 불합리한 개혁파 교회의 고백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구약에 나타난 성찬과 애찬의 그리스도 언약을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먹고 마시는 모든 사례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인 교회를 통해 성취하실 예표로서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에덴동산의 생명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만나, 광야 반석에서 나온 샘물, 가나안 땅의 모든 육축과 곡식들, 그리고 성전에서 제사장과 함께 먹은 모든 제사와 절기의 음식들 모두 그리스도 예표입니다. 이것을 간과하고 특정한 사람이 특별한 시간과 공간에서만 하는 것을 ‘주의 만찬’이라고 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로서 성찬과 애찬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개혁파 교회의 성찬식은 성령의 교통하게 하심인 성도 애찬(愛餐)의 왜곡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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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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