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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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28 19:5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복음에 대한 무지


종교개혁의 동력이 떨어지고 18세기 인간 이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감지되지 않는 것은 지식화할 수 없다. 지식화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사고 아래서 초월로서의 인격적인 하나님은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초월로 가는 다리가 끊어진 자리에서의 종교는 인간 내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물이 슐라이어마허의 내재신학이다. 20세기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는 칼 바르트의 초월신학은 되레 초월로 가는 다리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시대의 교회는 무언가 새로운 전환점을 찾으며 근근이 생명을 유지해 가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초대교회에 대한 강렬한 동경을 갖게 된다. 여기에 불씨를 던진 것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이다. 19세기의 끝 지점인 1900년 12월 31일 미국 캔자스주 토페카의 한 작은 교회의 송구영신 예배는 금세기에 가장 기억할만한 예배가 되었다. 찰스 파함이라는 흑인 목사가 목회하는 곳인데 이 교회에는 작은 신학교가 있었다. 파함은 학생들에게 과제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과제는 “초대교회와 현대교회의 차이가 무엇인가”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파함은 학생들의 과제물을 읽는 가운데 학생들의 공통적인 지적이 초대교회의 특징은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었고,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이 외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방언이었다. 그날 밤 그 유명한 송구영신 예배에서 파함은 학생들에게 차례로 안수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 여학생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아그네스 오즈만이라는 여학생이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정통파 오순절 운동의 시발이고 20세기 방언 운동, 성령 운동의 시발이다.
이렇듯 20세기 성령 운동은 방언으로 인해 촉발되었고, 그 운동이 은사 운동으로, 제3의 물결로, 열린 예배로 옷을 갈아입어도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방언이 있었다. 극히 일부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1906년 역시 흑인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세이모어의 지도 아래 아주사 거리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출발한 현대 오순절 운동은 뉴욕 타임스지가 지적한 대로 “반구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동안 미국은 온전히 이 운동으로 뒤덮이는 듯했다. 그 후 오순절 운동은 신·구교를 막론하고 세계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아마도 이 운동의 영향으로 교회들이 외적으로 대부흥을 경험하면서 번영신학이니 희망의 신학이니 풍요의 신학이니 하는 것들이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교회의 성장은 이 오순절 운동의 영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국의 성령 운동에 기름을 부은 것은 노먼 빈센트 필의 심리학이다. 그의 긍정적 사고방식과 적극적 사고방식을 목회에 적용한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는 일약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다. 그 웅장한 예배당은 미국을 찾는 목회자들에게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당시에 슐러의 설교 원고는 한국으로 송고되고 일주일 뒤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울려 퍼진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 성령 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시너지 효과는 삼박자 축복과 맞물리면서 기독교 일반 대중들에게 새로운 복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민족은 기복성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강한 민족이다. 그 뿌리는 민족성 저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속종교의 영향이다. 기복, 신비, 오락성은 무속종교의 골격이다. 신비적 은사, 방언, 병 고침, 물질적 현세적 축복은 한국인의 심성에 한처럼 서려 있는 소원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오순절 운동을 등에 업고 삼중축복을 신학화한 여의도 순복음의 성공비결이다. 미국의 수정교회와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은 20세기 교회들의 롤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부흥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 세기가 채 못되어 수정교회는 폭삭 망했고,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성공해 대형교회를 이룬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거의 망했거나 망해가고 있는 중이다. 최근 경기도 광주 성령교회는 300억 빚더미에 눌려 경매에 나왔다는 보도와 함께, 이단으로 비판받는 다락방교회가 매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성령교회 목사는 조용기 목사의 제자다. 그는 말하기를 스승의 지도를 받아 교회를 부흥시켰다고 말했다. 그런데 망했다. 그 보도를 보면서 필자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그 스승의 가르침대로 하면 망한다.” 20세기 미국교회 부흥의 상징이었던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는 망했다. 20세기 교회의 복음은 교인 수가 많아지는 것, 재정이 풍부해지는 것, 담임 목사가 유명해지는 것, 성도들이 잘사는 것이다. ‘육체가 건강하고 범사가 형통한 것이 곧 영혼이 잘되는 것이다.’ 거기에 십자가의 복음, 고난의 복음, 희생과 헌신의 복음은 설 자리가 없다.

폴 위셔의 현대교회를 향한 네 번째 기소장은 바로 ‘복음에 대한 무지’이다. 그는 오늘날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복음 위에 굳게 서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설교자 대부분이 복음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위셔는 이렇게 강조했다.

“복음은 구속과 화목의 역사적인 교리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속성과 타락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공의로우시고 인간은 참으로 악한데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려면 악한 자를 반드시 정죄하셔야만 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따라 우리의 죄책을 대신 지시고 그 나무 십자가 위에서 저주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죄가 되셨기 때문에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그 아들은 죄를 알지도 못하셨는데 그 아들에게 진노의 잔을 부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공의 아래 짓밟히셨기에 죄인을 구속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동시에 죄인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보다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무에서 창조되었지만 중생은 부패한 죄의 덩어리에서 재창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과 평행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은 구원을 결단주의라는 우상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결단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회심의 증거는 회심하는 순간에 가지는 어떤 진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지속적으로 맺히는 열매입니다. 우리 주께서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번영과 물질적인 축복이 진정한 믿음의 열매가 아니다. 그것을 추구하게 하는 설교나 가르침은 죄인을 회개시키지 못한다.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20세기에 일어나 오늘도 세계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성령 운동의 영향으로 부흥한 교회는 복음적인 교회라 보기 어렵다. 이런 현상으로 성장한 교회들은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 발자취를 따라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은 장래에 그렇게 성장한 교회들의 말로를 자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삼중축복, 오중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5)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효식 목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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