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6-04-24 20:0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진리 안의 ‘우리’

<싯다르타>

banner


나의 지난날들은, 인생의 ‘절댓값’을 찾기 위한 처절한 여정이었다. 그 절댓값을 찾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며 과정상에서 입은 내상이 심각했던 탓이다. 아마도 나는 (왜인지) 그토록 되기를 거부하고, 또 멋이 없다고 생각했던 ‘구도자’의 타입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며 체념 중이다. 그리고 지난날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음은, 역시 이미 많이 회복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내면의 한가운데에는, 불안과 고독과 두려움이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십 대에는 문학과 철학, 요가(운동으로써가 아닌, 종교적 색채를 띤)를 파고들었다. 거기에 답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늘, 타들어 갈 듯한 갈증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다.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해도 그때 뿐이었다. 즐거움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이 내면의 고통을 지워주진 못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있으면 느껴지는 일체감. 내가 상대방의 일부가 된 것처럼 평온하고 아늑하며 흡사 안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그 기분은, 혼자가 되는 순간 어김없이 박살 나 버렸다. 남편과 연애를 하던 초반에, 이 일체감이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절망했다. (낭만적인 개념이라 더욱 신봉하는) ‘영혼의 단짝’을 만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다. 마음의 고통도, 해묵은 숙제처럼 무겁게 품고 있던 질문들도. 
안이한 생각이었다. 그런 것들은 결코 사람을 통해 혹은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더 심각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쪽으로는 귀가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을 비웃고, 냉소하고, 무능하다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갈 데까지 갔던(?) 것 같다.
불과 1월까지 그러한 고통들에 잠식당해 쇠약한 상태에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했지만, 이것은 살아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그 무섭고 시커먼 게 그렇게나 달콤할 것만 같았다. 나는 진리를 아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지, 그렇다면 그것이 진리가 맞는지, 진리를 앎으로 고통스러워야 한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 뭐, 이런 식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싯다르타>의 싯다르타도, 구도자로서의 길을 걷는다. 진리를 찾기 위해 누리고 있던 삶을 버리고, 고행자 무리와 함께 도를 추구하다가 여인을 만나 사랑을 알고 장사치를 만나 세상의 이치를 배우다, 표표히 흐르는 강물 위에 노를 젓는 뱃사공을 통해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진리는 피안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살아 숨 쉬는 이 현실에 있는 것이며 행복은 그 현실에 나(자아)를 지우고 합류하는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부터 말하고 싶은 것은, 싯다르타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방황하는 기간 동안 나보다 더 아픈 눈으로 지켜봐 준 것도, 방황이 끝나자 누구보다 기뻐해준 것도 지체들이었다. 눈과 귀가 콱 막혀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었던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은, 세상에선 결코 찾을 수 없었던 중생한 이성의 고결한 지혜였다. 어떤 이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성찰적인 태도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으므로 자극이 되어주었고, 어떤 이는 그간 열심히 공부해온 탓에 축적된 말씀의 내공과 삶의 전선에서 쌓인 경험치로 나에게 깊은 공감과 뜨거운 위로 그리고 응원을 보내주었다. 아팠던 속에서 그들을 통한 배움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더 오랜 시간 동안 힘들었을 게 자명하다.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니, 햇빛의 결이 그렇게 생생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닿아오는 모든 것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성경을 읽고 강의를 듣는데, 내가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모든 말들을 하나님이 작정하고 쏟아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불안과 고독과 두려움이, 신과 단절되었을 때 오는 마음의 병임을 이제야 알았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일체감이, 피조세계에서는 한순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도. 오직 신의 존재를 통해서라야만, 내가 신의 일부로써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때라야만 내 영혼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거듭 확인하는 방법은 결국 영의 양식인 말씀을 충실히 섭취해야 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나 혼자였다면 깨달을 수 없었던 것들이다. 유기적인 몸의 관계처럼 연결된 지체들 덕분에 그 절댓값이란 것도, 평화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이기에, 앞으로 또 무수한 방황과 삽질을 하겠지만, 이제는 믿는 구석이 있어 든든하다. 믿는 구석 1번은 ‘말씀을 언제나 가까이 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과 더불어 말씀이 늘 곁에 있다는 것이고, 2번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려 줄 지체들의 애정과 응원이다. 혼자일 때보다 더 깊게 받아들여지는 진실들이 있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아는 것 믿는 것이 같은, 한뜻으로 신앙생활을 해가는 지체들께 감사드린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진아 (장안중앙교회)

더 옳은 명분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의 악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