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2-04-18 19:4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설교자 칼빈_33


종교 개혁자 칼빈은 설교자이다. 교회사에 가장 걸출한 강해 설교자는 요한 칼빈이었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달았을 뿐 아니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면서 삶의 현장에 적용시켰던 강해설교의 왕이다. 특히 칼빈은 연속 강해설교의 대가이다. 칼빈은 목사로서 또는 설교자로서 그의 영성은 참으로 대단했다. 예컨대 그의 욥기서 설교는 159편이나 된다. 칼빈은 참으로 방대한 설교를 한 데다 그 깊이에 있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영감을 가진 설교자였다.


하나님 중심의 강해 설교자

이제 설교자로서 칼빈의 생활 모습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은 1536년 27세에 제네바 셍 삐에레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설교자로서 사명감을 갖도록 새로운 동기부여를 받게 된 계기는 제네바에서 축출되어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서 그곳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됨으로 본격화되었다. 거기서 칼빈은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제네바 교회의 2년간의 설교는 하나의 시도요 실험이라면, 스트라스부르크의 설교 생활은 보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이고 그리고 체험적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스트라스부르크까지 피난온 모국의 형제와 자매들의 상한 마음을 감싸주기 위해서 설교했다. 그런데 그 자신 또한 제네바 교회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왔기에 설교자와 성도들 사이에는 영적 교감이 있었다. 그래서 스트라스부르크의 3년간의 피난민 목회가 칼빈을 설교자로서 더욱 성숙한 자리에 이르게 했다. 다시 제네바 교회로 복귀하여 본격적인 설교를 하게 되었지만 사실 칼빈의 설교가 오늘날 우리 한국식의 은혜 충만, 성령 충만의 부흥 설교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인기있는 설교도 아니었고 대중을 선동하는 설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성경의 본 뜻을 정확히 주해하고 그것을 적용시키는 설교였다. 루터의 설교가 남성적이고 부흥적이라면 칼빈의 설교는 해석적이고 분석적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칼빈의 설교는 하나님 중심이었다

당시 성도들은 천년만에 성경적인 설교를 듣게 된 셈이다. 칼빈의 종교 개혁은 설교를 통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신학은 학자들과의 논쟁이지만 설교는 신학의 마지막 표현으로서 일반 대중들에게 선포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설교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사람들의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 중심의 설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최우선으로 하는 성경적 설교였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설교보다는 사람의 지성과 감성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인지 칼빈의 설교는 세월이 갈수록 대중들의 호응이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칼빈마저도 설교에 많은 부담감을 갖고 낙심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지일관 연속 강해설교를 고집했다. 특히 1554-55년까지 1년 사이에 칼빈은 너무 낙심해서 설교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기는 한 교회에서 20여 년 동안 설교한 데다 칼빈의 목회행정 특히 종교회의(Consistory)를 통한 성도들의 윤리를 바로 세우려는 시도가 자유주의적 성도들에게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그 반발이 칼빈의 설교에 제동을 걸었다. 더구나 칼빈은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엄청난 내부적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에 설교의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복음적 교회 건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 뿐임을 확신하고 끝까지 말씀 증거에 최선을 다했다. 만에 하나 칼빈이 교회의 어려움과 그리고 주변의 세력들을 의식하고 그들과 영합하고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설교를 했다면 오늘의 개혁교회는 어려웠을 것이다.


즉석 설교지만 깊은 연구와 기도로 연속 강해 설교를 했다

물론 칼빈은 자신의 설교 내용을 직접 작성하여 선포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즉석 설교의 형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나는 대로 설교하는 즉흥식 설교는 아니었다. 그는 깊은 성경원어 연구와 신구약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를 깨닫고 성도들의 삶과 더불어 성경을 깊이 묵상한 후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강단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설교할 때 그의 설교를 속기하도록 했다. 칼빈에게는 속기 비서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 설교 속기는 주로 불란서에서 피난 온 데니스라구니에(DanisRaguenier)였다. 그는 11년간이나 칼빈의 설교를 필기했다. 그 결과 칼빈의 설교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2,025편 정도 남아있다. 칼빈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주일 아침과 오후, 평일에는 월, 수, 금요일 등에 설교했다. 칼빈의 설교는 연속적 강해설교로서 주일 오전에는 신약을 주일 오후에는 시편을 월, 수, 금요일에는 구약을 강해하였다. 이렇게 해서 욥기 159편, 신명기 200편의 강해 설교를 했다. 칼빈은 부활절에서 10월 초까지는 아침 6-7시, 겨울에는 7-8시 집회를 가졌다. 사실 칼빈은 오늘날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인적인 목회를 했다. 물론 칼빈은 자기 설교를 출판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어떤 때는 논문 대신에 설교가 출판된 일도 있었다. 우리는 신학자, 주석가로서 칼빈을 아는 것보다 설교자로서 칼빈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강해설교의 왕, 칼빈_34
21세기에서 1세기의 예수님 바라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