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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0-07 21:4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 정신의 원형찾기 VIII : ‘징계’를 간구해야 할 한국 교회


5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 7~1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의 매’마저 한국 교회를 버리고 있다.  부모의 무관심이 자녀에 대한 부모 사랑의 포기라고 한다면, 이 말은 한국 교회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 포기 선언에 대한 상당한 증거로 보인다. 앞서 인용한 본문의 핵심은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징계’에 담겨 비유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사랑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혈육의 아비가 갖는 자식 사랑을 위한 징계, ‘사랑하기 위해서’ 반드시 매를 들어야 하는 아버지의 비장함과 엄격함이 바로 후려치는 회초리 끝에서 징계받는 자가 ‘친아들’임이 증명된다.   
솔로몬 왕은 다가올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을 하나님의 징계로 보고 있다. 아들 르호보암에게 솔로몬은 자신의 사후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과 후대 왕들의 부패 그리고 이방민족의 침입과 남북 이스라엘의 멸망, 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 자손을 버리는 과정이 아니라 ‘징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언약 자손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을 명심하라고 일러주신다. 이 말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보다 더 부강한 통치 국가로 발전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하는 자신의 나라가 왜 이방 나라보다 볼품이 없냐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아가 혹독한 징계를 받더라도 그것이 언약 자손을 사랑하는 징표임을 알라고 예언해준다. 이러한 예언 없이 버린다면 언약 자손들은 징계를 받을 때 자신들이 버림받은 사생아인 줄 알기 때문이다. 징계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도 한다. 하지만 징계를 미리 예언하시고 그 징계가 여호와 하나님의 친자(親子) 확인 과정임을 알려주는 것은 성경진리 밖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러한 친아들 확인 절차에 대해 솔로몬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매서운 징계를 통해 당신에게만 ‘더욱 복종하며 살게 하시려는 의도’라고 전하고 있다. 비록 아들을 어떻게 저런 악의 무리에게 맡길 수 있냐고 항변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잠시 자기의 뜻대로 아들을 징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의도’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몸은 이 땅에서 채찍을 맞는 징계를 당하고 있지만 그 영혼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품속 자식’임을 거듭 확정해준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솔로몬으로 이렇게 깨닫게 하신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아버지의 무서운 징계가 어찌 친아들의 정당성과 친아들의 평안을 약속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의 아버지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런 모양새가 있을 수도 있지만 금방 그 한계가 드러난다. 하나님 여호와의 자기 자녀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한 경험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솔로몬 왕에게 준 영원한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면, 누구도 그 징계가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정의로움과 평안으로 여길 수는 없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반드시 징계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 징계의 의미를 알려주셔야만 하고 또한 그렇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의 채찍과 그 관심의 징계가 한국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렇게 부패하는 데도 여호와 하나님은 그 매를 들지 않는다. 악한 지도자들이 성도의 재산을 갈취하고 성도들의 신체를 희롱하는 데도 ‘묵묵부답’이시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망할 때보다 더 무관심하게 버려두는 것 같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망할 때는 비록 백성들은 듣지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선지자를 보냈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는 신학교는 성경을 외면하도록 버려두시고 교회 강단에서는 성경을 장시간 교육하면 성도들은 듣기 싫어한다. 목사라는 어떤 자들은 성경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성도를 향해 ‘너무 알면 이단으로 빠진다’는 정신 나간 소리까지 한다. 중세 로마 가톨릭보다 더 부패한 곳이 한국 교회라는 신앙 원로의 진단은 점점 현실화하고 있다. 직분에 대한 매관매직, 교회 재산에 대한 가족과 친인척 동원의 교묘하고도 추악한 세습, 강단의 우상화와 성도에 대한 우롱, 무지몽매한 성도들의 목사 신격화 등 온갖 범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고 하나님의 징계가 오고갈 수는 없다. 버려도 아예 버린 것은 아닐까?

몇 시간 거리 지하에는 진리의 말씀을 애타게 사모하는 북녘의 형제들이 수만 명 오늘도 목숨과 진리를 바꾸고 있다. 징계 속에서 더욱 진리를 사랑하고 있다. 남한은 쌀독 쥐처럼 너무 배불러 아쉬운 것이 전혀 없다. 성경 진리에 대한 열정은 고사하고 진리에 대한 관심까지 꺼져간다. 출산율이 급격히 낮아져서 문제라지만, 영적 자녀의 양육의 관점에서 보면 낳아놓은들 진리로 어떻게 공들여서 키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지고 있다. 태어나는 자녀를 보며 ‘어떻게 하면 성경의 진리로 잘 양육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부모가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사랑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 자체가 교회에서 사라지고 있다. 징계를 내려달라고 해서 징계가 오는 것은 아니다. 솔로몬은 징계받을 후대의 왕들을 안타까워하기보다 ‘다행’으로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징계를 받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한국의 교회는 이러한 여지마저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목숨과 진리를 바꾸려는 성도가 지척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리는 무감각하다. 어떤 자들은 북쪽은 무엇인가 큰 잘못을 했기 때문에 저렇게 징계를 받는 게 당연하고, 우리는 뭔가 잘했기 때문에 이렇게 잘 산다고 한다. 하나님의 징계마저 우롱하고 희롱(戱弄)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면, 더 남은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으로 이런 고백을 전달하게 하셨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 12:1). 그런데 징계 자체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이 아닌가? 여기 우리 한국 교회가?
아버지 하나님, 우리 한국 교회를 사랑하시면 징계의 복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가진 모든 것을 노아 홍수처럼 쓸어버려서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생명의 말씀, 성경진리를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시 진리를 사랑하고 싶어서 주의 명령에 따라 회개합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5~19).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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