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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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4-11 22:1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4월의 아침


어느덧 4월이다. 이른 아침, 창밖이 새삼 그리워 창문을 열었다. 사방이 꽃 구름이요 꽃내음이다. 자목련이 흔들린다. 누가 왔나 보다. 바람, 바람이구나. 앞뜰에 도착한 바람, 한데 왜 자목련은 울상이 되어 입술을 비죽이는 걸까.

목련꽃이 지고 있다. 아,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그렇다고 바람을 탓하랴. 귀촉도가 울고 난 뒤에 새벽 동이 트면 먼 산도 눈앞에 선뜻 다가서는 폼인데, 바로 이 아침 꽃이 지다니, 와락 끌어안고 한없이 울어주고 싶다. 울지 않겠노라 굳은 다짐을 하고서도 터져 나오는 것이 눈물이다. 낙엽 지는 가을에 그대 가고,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눕고,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맞는 풀꽃처럼, 밟으면 밟힌 대로 꺾으면 꺾인 그대로 살지 않았던가. 밤이면 산에 두견새 울음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이 드는 탓일까. 이 아침, 목련의 중량감이 돋보인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나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추켜올리며,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내는 저 모습.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저마다 살다 가는 길도 제각각 삶과 죽음이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은가. 길가의 풀처럼 인생은 그대로 정한 뜻을 따라 자유로우면 된다. 꽃이 없어도 죽고, 꽃만 있어도 죽고, 뿌리가 든든하면 산다. 꽃은 굳이 맹세하지 않아도, 침 튀어가며 부르짖지 않아도, 겨우내 죽은 듯 살다가 때가 되면 피고 때가 되면 지지 않는가. 반면에 인간만은 영 그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살기도 죽기도 왜 이리 힘이 드는 건지. 목련의 낙하를 일컬어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는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성실 탓이다. 그런데 나는 왜 눈물이 날까. 정녕 알 수 없는 게 눈물이다. 시시때때로 감정의 발로에 따라 흘리는 눈물, 샘터에 물 고이듯 내 영혼을 적시는 눈물.

눈물. 이 무색의 투명한 액체는 마술사인가. 도대체 이 눈물의 주인이 누구 이기에 사람의 감성을 멋대로 다스리며, 희로애락 사이를 무시로 넘나드는 것일까. 마디마디 사무친 움직임인가. 응축된 이슬인가. 한 점 바람에도 눈물 나게 하고, 한 포기 이름 없는 풀꽃에도 고개 숙이고 싶은 4월. 울 수 있는 행복, 울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웃음도 좋지만, 눈물도 좋다. 그래서 목련꽃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못난 나에게 감사와 찬송을 하게 역사해 가시는가. 고통 많은 세상에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살게 해 주심에 감사해서 울고,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왜 깨닫게 하는지, 삶의 그 의미에 놀라며 그를 인정하게 하심에, 그를 경외하고 섬기며 살아가게 하심의 감격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붉어지는 내 두 눈이 또 글썽, 내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 여호와를 위하여, 깨어진 질그릇 중에 한 조각 같은 나에게,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또 하늘을 본다. 요셉은 자기 어머니 라헬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확인하고 마음이 타는 듯, 너무 감격하여 울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울지 않았던가. 괜히 눈물의 성분을 분석하지 말라. 양파 깔 때와 달리 감정이 섞인 눈물에서만 발견된다는 카테콜아민을 몰라도 눈물의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2010년 봄이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서, 어느 독서실 사무실을 개조하여 살다가, 이듬해 어렵사리 은행 융자를 안고 조그마한 아파트를 샀는데, 또 경매로 넘어갔다. 눈물도 기가 막히면 나지 않는다. 나는 내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때, 아! 여호와여! 생각나게 했다. 그 이름 여호와! 누구 때문이랄 것도 없이 하나님의 작정섭리였다. 그렇게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 믿어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편안한 잠을 주셨다. 하나님은 더 좋게 해 주셨다. 망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교회로 옮기지 못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때리심이 없었다면 싸매심도 없고, 떠나지 않았다면 돌아올 리도 없었다, 그 짜고도, 달고도, 뜨겁던 눈물, 그 감동의 눈물, 예기치 못한 암초에 넘어졌으나 당황하지 않게 하고, 원망하기보다는 되레 믿음이 굳게 세워져 가게 했다. 시련을 주실 때는 아주 넘어뜨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교회는 체제개혁이 시작되었고, 의미 분석 성경개론을 따라 공부하게 되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하여 너무도 분명하게 확증하여, 믿어지게 하고, 배우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여 주시는 지혜에 감격하게 된다는 것.

생각해 보면 진정 내 것이란 애초부터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다. 빼앗아 가도 할 말이 없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이 아침,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찬송, 그것은 울음이었다. 어찌 잊으랴. 그 울부짖음의 의미를, 어디 나만 그러겠는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보라. 봄에는 새가 울부짖고, 여름에는 뇌성 병력이 울부짖으며, 가을에는 풀벌레가 울부짖지 않는가. 그리고 겨울에는 세찬 바람이 울지 않는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때가 되면 울부짖는 그 슬기야말로 내가 가까이하면 할수록 커지는 공명인가.

나는 울보인지도 모른다. 남이 울면 곧잘 따라 운다. 눈물은 순수이다. 마음이 동하여 자연스레 흘리는 눈물 속에 무슨 잡티가 섞여 있을 것인가. 육체의 분비물이 아니다. 고갈된 정서에 촉촉이 물기를 적셔주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자석 같은 것, 눈물은 한마디 말이 없어도 좋다. 짜든 달든 상관없다. 한 방울의 눈물이 그 얼마나 많은 말들을 대변해 주던가. 기쁨, 회한, 감격의 눈물, 눈물들.

4월의 이 아침, 나를 다스릴 참 왕을 주심에 감사한다. 소망이 있는 한 눈물은 값진 것이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내 안에 여호와 이름이 새겨져 있다. 끝내 아버지를 닮고 말 것이다. 여호와여! 또 부르고 또 울고, 아버지 이름 실컷 부르리라. 지혜의 이야기는 홍시처럼 잘 익을 때까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본 것처럼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심오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진정으로 찬양하게 될 때까지.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강미정 권사 (광주산수서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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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모 그리고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