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라이프

 
작성일 : 17-05-25 19:5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말씀을 되새기면서


내가 생활하는 서너 평 크기의 방에는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베개 하나가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여있는 인터넷 스위치를 켜면 하나님 말씀, 일용할 양식이 쏟아져 나온다. 날마다 그 말씀을 먹음으로 힘을 얻고 움직여 기동하게 된다. 모든 만사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섭리되어지는 역사 속에서, 영광을 아는 빛을 내 마음속에 비춰주신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지게 하셔서, 언약의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은 물론 그 존재와 속성들을 알고 깨달아가게 한다.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볼품없고 티끌 같은, 죄악이 가득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켜놓았던 인터넷 스위치를 잠시 껐다. 나약한 인생이기에, 마음 한구석에 죄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는 물론이고, 금방 들었던 말씀도 생각나지 않는다, 베개를 치워버리고 침대 위에 큰대자로 누워본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무료에 젖는다. 몇몇 친구들에게 다이얼을 돌려도 약속이나 한 듯 부재중이었다. 갑자기 외로움이 나를 감싼다. 고향을 떠나와 세계적인 거대 도시 서울 근교에서 느끼는 고독이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여유로운 시간을 주셨을까. 나에게 건강 주셨을 때, 왜 그렇게 살았던고,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한낮이 되었다. 앞마당에라도 다녀올까 하다가 포기했다. 기다릴 사람도 없고, 아무도 찾아와 줄 이가 없는 고독이라도 왠지 싫지가 않다. 물질의 가치만을 만능으로 여기며, 이웃과의 단절된 울타리 안에서 자기도취에 만족해한다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바탕으로 사색의 체를 거쳐 더 진실해질 수 있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감각적이고 세속의 그 어떤 것이 나의 고독을 달래줄 것인가. 현실이라는 굴렁쇠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도약하며 잠시 쉬어가는 안식이 아닌가. 평소 느껴보지 못한 고독으로 빠뜨리는 시간이 어인 일인지 밉지 않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사건들, 다양하고 복잡한 크고 작은 일들, 그리고 기쁜 일이나 괴로운 일, 행복한 일이나 불행한 일이나 하나님의 작정된 프로그램에 의해서 잘 진행되어져 왔지 않는가. 범사에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고 크게 불평 없이 말씀 안에서 행복하다 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인간은 이 세상에 왔다가 돌아가는 것이라지만 미래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기에 당황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고뇌하고 밤낮으로 우울해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마음이 평안하기 때문이리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까? 하는 문제를 주지 않는 것만도 어딘데, 말씀을 듣다가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되게 하는 대로,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말씀 속에서 삶의 가치를 알고,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내 안에 고독이 내재되지 않았다면 보석 같은 진리는 물론이고, 내 주제 파악도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질문에 해답을 회피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성경을 깨닫게 하지 않았다면 헛되고 헛된 인생으로 어둡고 뒤틀린 삶을 살아 갈 것은 뻔할 뻔자다. 아마 여호와를 모르게 했다면 허무한 인생으로, 그 비참함을 누구 탓으로 돌리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성경은 타락된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에 이미 저주를 받아 영적으로는 죽은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죽어 있는 영을 소유한 육체로 태어난다. 그리고 사단의 노예가 되어 범죄하며 스스로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다 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살아있는 말씀의 씨가 죽은 내 영을 다시 거듭나게 하셔서 점점 거룩한 백성으로 삶을 살아가게 한다. 예수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살게 한다. 거저 주시는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찬송하게 하는 방법, 탕자비유가 생각난다. 방탕하다가 돌아온 탕자를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다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로는 절망을 경험케도 하고, 내 수단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게도 하시지만, 은혜가 은혜 됨을 깨닫게 하시고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셔서 평강을 가져다주고 감사와 찬송을 일으켜 주는 말씀이다.
나는 입버릇처럼 딸에게 하는 말이 있다. 오직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을 깨닫는 길밖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고, 성경은 특별계시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사건으로 절정을 이루시고 약속한 성령을 보내셔서 사도들을 통하여 완성시키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능력의 말씀으로, 세상 지혜와 다르다. 알지 못하는 것을 신앙하는 무지한 맹신의 종교가 아니라 철저히 알고 믿는 지혜의 종교이다. 딸은 듣는지 마는지 아무 말이 없다. 돌아보면 누구랄 것도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성경의 구조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었다. 지엽적인 부분만을 접하다 보니까 회의와 갈등을 겪으며 살아왔다. 성경을 개론적으로 올바르게 정립하고 살펴보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교회의 체제개혁이 시행된 이후부터였다. 언약성취사 중심으로 일관성 있게 논리적 체계를 세워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된 성경강론 책들은 그저 귀한 장식품이었다. 잘 보관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때를 따라 깊은 진리가 담긴 강론 책 위에 수북하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말씀이 귀에 들리고 눈으로 확인해 가는 삶 속에 행복의 파도가 밀려왔다. 성경신학보다 더 좋은 것을 찾는다는 것은 속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은혜로 주시려고 나를 불순종 안에 가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만물을 하나님이 다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신다는 바울의 찬양이 나를 울린다. “깊도다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바울이 부른 이 놀라운 찬송이 내 심령 속에 차고 넘치기를 소망해 본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게 하며, 받은바 은사대로 행하게 하실 것을 구비해 놓으신 하나님, 이 또한 은혜의 선물이 아닌가.

햇살이 곱다. 현관문을 밀치자 기다렸다는 듯 햇살이 뛰어들어온다. 생명의 빛이 가득한 5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 봄 동산으로 나를 안내한다. 연분홍 복사꽃은 벌처럼 날고 하늘에서는 춘흥에 젖은 종달새가 지저귄다. 신록은 푸른 융단이 되어 가슴을 싱그럽게 하고 그 풋풋한 향을 호흡하게 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으로 오늘 한 날도 나를 잊지 않고 사랑한다는 사실만 믿어진다면 어찌 인생을 고독하다 하겠는가.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강미정 권사 (광주산수서광교회)

영원한 사랑
스쳐가는 시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