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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5-09 19:2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독교 행복의 심리적 조건은


“기독교 행복의 심리적 조건은 지엽적인 것으로서 종교적 조건에 의한 심령의 평안과 그에 따르는 만족감의 충만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심령의 평안과 만족감의 충만은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한다.” (박용기 저, 기독교 행복론 p.47)

위의 인용한 글은 『기독교 행복론』(박용기 저), 행복의 조건 중에 심리적 조건을 이해하기 쉽게 기록해 놓은 글이다. 이 글을 참조하고, 예전에 들었던 특강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힘입어 글을 쓴다는 것이 나로선 행복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편 131편에 보면, 하나님을 알고 나니까 다윗은 굉장히 겸손해졌고, 큰일과 미치지 못할 일을 힘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다윗이 하나님을 몰랐다면 쉴 날이 없이 고뇌해야 하고, 하루 한 날 평안한 날이 없이 야망을 가지고 큰일을 꿈꾸며 살 뻔했다. 다윗이 한때, 자기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었다. 자기 왕궁을 순금으로 지어놓고, 왕궁보다 더 아름답게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장막 안에 있는 언약궤를 안치시키고 싶었다. 왜 인간이 그런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런데 그걸 여호와께서 허락지 않는다. 결국 다윗은 포기하게 되고, 진짜 통치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기 때문에 자기 심령이 고요하고 평온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다는 것이다. 아이가 배가 고파서 울다가, 엄마 품에서 양쪽 젖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 젖꼭지에서 입을 빼놓고는 사르르 잠이 든 아이의 모습 같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자의 본바탕이 아닌가. 주변 모든 나라들을 다 정복한 다윗인데도 자기 주제 파악을 정확하게 한 다윗, 그래서 다윗은 행복을 얻고 여호와만 바라며 살라고 노래한다.

만일에 인간의 고통이 고통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러나 그 고통은 영혼을 살찌우고 삶의 깊이를 더해준다, 다윗이 열방이 쳐들어올까봐 근심 걱정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는 데서 평온이 있었다. 그러니까 마음이 평안하면 만족감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감사가 넘치는 행복을 느끼게 된다. 심령의 평강은, 욕심과 함께 짜증과 불만을 수반하는 육체의 안일과는 전혀 다르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 내 마음 나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 마음에 평안을 주겠는가. 그러나 종교적 조건만 정확하게 가지고 있다면 문제 될 것 없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준다. 주는 방법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해서 평안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의 조건에 있어서 종교적인 조건은 뿌리 역할을 하는 근본적 조건으로 두뇌 기능을 깨끗이 해결해 주고, 심리적 조건은 가지나 이파리로서, 뿌리가 살아있으면 반드시 줄기와 잎은 피게 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을 잘 알고 믿게 되면 행복하다는 말이다.
하나님 지식에 의한 신앙의 산물인 심리적 조건은 믿음으로만이 이루어지게 되고, 이 조건은 행복이라는 것과 가장 밀착된 마음으로 만족감이 가득 차 있는 속에서부터의 행복이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근심하지 말자’ 해서 평강이 얻어지고, 그렇게 내 마음을 주관할 수 있다면 인간이 다 행복하고 병들어 살 사람 하나도 없을 것이다. 누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있는가. 내 마음을 내가 다스려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은 죽는 날까지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보았지만, 성경을 배워 신앙하는 이 길 외에는 행복한 길이 없다. 성경 말씀을 깨닫도록 성령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물론이고, 하나님이 어떠한 속성을 가지셨는가를 나로 하여금 알고 믿어지게 하므로 마음에 평강이 이루어지고, 모든 염려와 근심은 버려지게 되며, 만족감의 충만과 함께 감사가 넘치는 행복을 느끼게 된다. 
마음이 평안하면 모든 게 만족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족해야 평안하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내 욕심을 채울 때 만족이 온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욕심을 채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욕심은 한도 끝도 없고 채워지지 않게 되어 있다. 속지 말자. 공연히 다른 데 마음 빼앗기고 헛수고하지 말자. 되게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다. 불평불만 없이 사는 게 행복한 생활이다. 욕심이 사라져야 만족하고 평안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평안하니까 만족하게 되고, 만족하니까 욕심이 사라지게 된다. 욕심을 버려야 된다는 사실은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욕심이 안 버려지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욕심이 안 버려지는 이유는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고, 만족하지 않는 이유는 평강이 없기 때문이고, 평강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하지 않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고 믿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아니하게 되면 이래도 만족이 없고 저래도 만족이 없고, 그래서 이 짓도 해보고 저 짓도 해보고, 외부적으로 오는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행복의 조건 중에 종교적 조건은 신지식과 그에 수반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루어지고, 심리적 조건은 심령의 평강과 그에 따르는 만족감의 충만인데, 만족감이 없는데 감사할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감사하지 않는 인간들의 불만과 염려 걱정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면 삶 전체가 감사할 일인데, 감사할 일과 불만스러운 일을 인간이 나누어 놓고 사고를 해나가니까 늘 갈등 속에서 살게 된다. 엄밀히 따지면 염려와 근심 걱정은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타락하고 고통당하는 것이 없이는, 욕심과 함께 짜증과 불만뿐, 행복은 있을 수 없다. 역시 만족감이 오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철들 나이만큼 살게 하면서 이런 경험 저런 경험을 겪게 한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고통을 느끼게 된다.

나는 우울증에 시달렸던 때가 있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었고, 누군가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었다. 여호와께서 내 몸을 내가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서 마음이 평안해지고 약을 끊게 되었다. 그리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휴우! 참 평안하다. 참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면서 단잠을 자게 되었다. 안 되는 것도 감사하게 되는 이 진리(성경신학), 범사에 만족하면서 감사하며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는 하나님 말씀을 항상 기억하면서.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강미정 권사 (광주산수서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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