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라이프

 
작성일 : 20-09-27 12:4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김 선생님께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세요. 너무 오랜만이에요. 제가 1953년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도 선생님을 찾아뵙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조금만 말씀드려도 저를 아실 거예요. 선생님과 사연이 많았으니까요. 선생님은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거든요. 저를 반장으로 임명해주셨잖아요. 이제 아시겠죠? 선생님은 정말 멋있고 훌륭하시다고 생각했거든요. 축구도 잘하시고, 오르간도 잘 치시고, 공부도 잘 가르치시고, 미남이셨잖아요. 그리고 그림은 얼마나 잘 그리셨는데요. 국전에 출품하셔서 일등으로 수상도 하셨고요. 훌륭한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하게 된 것이 너무 행복했답니다. 제가 자라서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도 했으니까요.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선생님 생각이 나서 늦게라도 글을 올리게 되었어요. 무슨 사연이 있냐고요? 물론 깊은 사연이 있지요.

어느 날 학교 전체가 학급별로 환경정리가 한창이었을 때였죠. 선생님은 저를 교무실로 부르셨어요. 너무 바쁘다며 좀 도와달라고 하셨거든요. 저녁에는 선생님 집에서 함께 자고 내일 같이 학교에 오면 된다고요. 부모님께는 다른 친구를 통해 연락할 테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셨거든요. 저는 하늘을 날듯이 기뻤답니다. 선생님은 제가 참 사랑스러웠나 봐요. 저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선생님이 시키시는 대로 붓을 들고 커다란 종이 위에 글귀도 쓰고, 몇 가지 통계도표와 그림도 열심히 그렸죠. 선생님은 놀라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거든요. ‘너는 예술적 자질이 풍부하니까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 이제 기억나시죠. 성만 다르고 이름도 선생님과 비슷했잖아요.

일을 끝내고 학교 근처에 있는 선생님 댁에 처음 가보았거든요. 큰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채와 행랑채가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참 부자로구나!’ 생각했죠. 처음 먹어보는 좋은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끝낸 다음, 선생님은 사모님을 건넛방에서 주무시게 하시고, 저를 품에 안고 주무셨거든요. 푹신한 비단 이부자리가 일품이었으니까요. 집에서는 맨바닥에서 이불만 덮고 잤거든요. 정말 황홀하기까지 했답니다. 교회학교 유치부에서 배운 것이 자꾸 생각이 났어요. 선생님이 부자라서 지옥에 가면 어떻게 하나!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너는 꼭 훌륭한 화가가 돼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세계적인 화가가 되기로 단단히 각오하기도 했죠.

선생님은 제가 5학년이 되었을 때도 담임을 맡게 되어 너무 좋았답니다. 공휴일이면 선생님이 야생화를 그리시려고 경관이 좋은 곳을 찾아 가실 때는 항상 저를 데리고 가셨거든요. 그림 공부를 시켜주시려는 깊은 배려임을 알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정말 생각하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때로는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가 싶은 마음에 염려가 되기도 했어요. 일학년 때부터 친구들의 많은 시기와 질투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많아서였죠.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하고, 욕을 먹기도 하고, 맞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선생님! 지금쯤은 세상을 떠나셨을지도 모르면서 이제야 글을 올린 깊은 사연이 있답니다. 선생님을 생각하며 훌륭한 화가가 되려고 그림 공부를 열심히 했었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처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갈 거라고 단단히 각오도 했답니다. 세계적인 화가가 되어 선생님 찾아뵙고 큰절을 올리려는 생각도 했고요.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일 학년 이 학기 때까지 입학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답니다. 일본의 침략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너무 가난해졌기 때문이죠. 밀려오는 절망감에 밥도 거르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요. 이 학기가 되어서야 아버지께서는 약 이십여 리쯤 멀리 떨어진 시골 중학교에 편입시켜 주셨어요. 아들의 성화에 아버지께서 견디지 못하신 거예요. 생각하면 아버지께 불효자식인 셈이죠. 공교롭게도 미술 시간에 국전에서 특상을 수상하신 정말 훌륭한 미술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집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두꺼운 ‘스케치북’을 보시더니 손에 펼쳐 들고 교실마다 찾아가 보여주면서 우리 학교에 대단한 인재가 입학했다고 자랑을 하신 거예요. 저는 훌륭한 화가가 될 것만 같은 자신감이 가슴에서 솟구치기도 했답니다.

중학교 학업을 모두 마치고 졸업식을 1개월쯤 남겨 놓고 있었죠. 마지막 종료 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등록금 미납자는 내일부터 등교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언제라도 등록금을 마련하면 등교하라는 것이었어요. 온몸에 맥이 풀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돈이 없어서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했거든요. 결국, 졸업장도 받지 못했답니다. 훌륭한 화가도 될 수 없잖아요. 생각대로 화가가 되어 성공했다면, 일찍이 선생님을 찾아뵙고 엎드려 큰절을 드렸겠죠. 때로는 선생님에 관한 생각이 나면 정말 괴롭기까지 했답니다. 선생님 뵐 면목이 없었거든요. 선생님! 정말 안타까우실 거예요. 선생님은 ‘그때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역정을 내실지도 모르죠. 선생님!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선생님! 지금은 놀라운 희소식이 있어요. 선생님이 싫어하실지! 좋아하실지! 모르지만, 정말 좋아하시고 박수를 쳐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조심스러워 말씀드리기가 주저되기도 하네요. 제가 세계적인 훌륭한 화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경 교사가 되어 열심히 살고 있거든요. 중학교 졸업장이 없으니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도, 파리 유학도 모두 뜬구름이 되고 말았잖아요. 한동안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이며,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마루 끝에 쭈그리고 앉아 고민하다 눈물짓고 있는 것이 제 모습이었답니다. 선생님을 찾아뵐 면목조차 없었고요. 선생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예수님을 믿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절망 중에 있는 저를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형통한 길로 인도해주셨어요. 선생님! 화내지 말아 주세요. 중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 훌륭한 화가가 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여호와의 이름만을 자랑하고 찬양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선생님의 제자가 행복하게 살고 있으면 되잖아요.

찾아뵙고 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미 잠드셨겠지만, 부디 평안히 주무세요. 사모님도요. 감사합니다.


2020년, 너무 사랑받던 제자 드림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독자기고

장 목사님께
김 선생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