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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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7-21 21:0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조 선배님에게


선배님! 어느 산자락에 잠들어 있는지요? 선배님은 초등학교 3년 선배였지요. 제가 기도원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해서 선배님을 만나 농촌 계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한밤을 지새웠잖아요. 저와 헤어진 후,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농촌 마을에서 목회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거든요. 20여 년이 지나 하나님 나라에 가셨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지요. 너무 아쉽다는 생각에 마음이 허전했답니다. 1969년 2월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아닌 상태에서 헤어지게 된 것을 못내 잊지 못하고 있거든요. 초기 어려울 때는 아무 갈등이 없이 함께 살았잖아요.

선배님은 농촌 계몽운동 초기에 동역자였죠. 1960년 9월 15일, 고향에 있는 교회에 ‘성경구락부’를 개설하여 야학을 시작했죠. 얼마 지나 교회에서 우리를 추방하려고 나에게 수찬 정지를 시켰잖아요. 죄목은 학생들에게 성경을 틀리게 가르친다는 거였죠. 교회 집사님들에게 몰매도 맞을 뻔해서 많이 울기도 했고요. 6개월이 지나면 자동으로 해벌이 되는데, 만 4년이 지나서야 해벌을 했거든요. 직무유기를 한 셈이죠. 야학은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요. 전전긍긍하다가 다음 해 가을, 면장님의 도움으로 산비탈에 마련한 천막에서 ‘국민성서학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야학을 다시 시작했잖아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지요. 근동 마을의 미취학 소년 소녀들이 천막 교실을 향해 비탈길을 오르는 것을 보며 마음을 다지곤 했지요. 교재와 학용품은 물론 교사도 마련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각오로 원예와 버섯재배 또는 ‘노동조합’ 및 ‘산지개척협회’ 등을 조직해서 활동하기도 했잖아요.

급기야 1961년 12월에 근동 주민들의 뜨거운 협조로 초가집이지만 버젓한 교사를 마련했지요. 뜻을 같이한 동역자들은 농촌 마을 10여 곳에 흩어져 야학을 시작하고 흙벽돌 초가집 교실도 마련했고요. 선배님도 1963년 8월에 지리산 천왕봉 산자락 농촌 마을에 정착하여 개척을 시작했지요. 전국 농촌마다 ‘성경 서당’을 세우려는 꿈은 점점 무르익어가는 듯했거든요. 나는 고향에 남아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고요. 여기서 멈출 수 없잖아요. 하나님께 간절히 지혜를 구하며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들어갔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지요. 친척을 비롯한 근동 유지들에게서 벼 백이십 석을 빌려 대지 천여 평을 매입했거든요. 1968년 9월에 드디어 손수 부대 건물을 준공했고, 본 건물은 기초공사도 하면서 나 자신도 놀랐답니다.

근동 마을 농민들을 일깨우려고 ‘농촌계몽강연회’를 기획했죠. 특별 강사를 초빙하려고 상경해서 마음에 담아둔 세 분 명사님을 찾아 방문했거든요. 그중에 농촌운동에 헌신하고 계시는 강 박사님을 찾아가 초청을 했지요. 쾌히 응해주셨어요. 다른 명문대학교 김 총장님은 병중이셨고요, 또 한 분 명사이신 유 박사님은 마침 부산강연회에 선약이 되어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어요. 예정된 강연회는 초등학교 대강당을 빌려 1박 2일 동안 진행이 되었죠. 결과는 생각 밖에 좋은 반응을 얻었거든요. 선배님도 강연회 참석차 와서 사회도 보셨잖아요. 며칠 머물고 계시던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떠나셨어요. 그 이유는 몇 년 만에 눈부시게 발전한 학원의 모습을 보고 생각이 달라지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는 깊은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죠. 몇 년 동안 함께 고난의 짐을 지고 살아온 동역자를 잃는 아쉬움이 컸으니까요. 선배님이 갑자기 형성된 재산에 대한 명의를 공동 명의로 하자고 요구했잖아요. 그러자 앞으로 갚아야 할 빚이 많기에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죠. 빚을 다 갚으면 학원재단으로 등재할 것이라고요. 물론 제가 사유재산을 만들 염려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해봤죠. 10여 년 동안 채무를 모두 청산했을 때는 이미 ‘국민성서학원’은 휴원이 된 상태였어요. 재단을 관리하던 학원 출신 동역자가 갑자기 찾아와 자기 소유로 하고 싶다잖아요. 흥정도 없이 대금을 알아서 가져왔기에 교회당 건축 연보로 입금하고 마무리했거든요.

선배님! 전에 경직된 얼굴로 돌아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몇 차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죠. 1977년 11월에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했지요. 대학생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그들에게는 성경을 성경대로 풀어 가르쳐야 하거든요. 한 달이 다르게 분위기가 달라지는 거예요, 노회에서 알고 이단이라고 면직을 시키더라고요. ‘성전’이 아니라 ‘교회당’이라든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이라든가, ‘십일조’가 아니라 ‘연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래요. 신학교에서 배우기도 했고 성경대로 가르친 거죠.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이 있잖아요.

총회에서 7년 만에 해벌이 되고 몇 년이 지나, 교회 대지 250평을 매입했죠. 사실을 알게 된 노회에서 교회 장로님들을 포섭하고 나를 이단이라고 시비를 걸더라고요. 하루는 재판국원 장로님 한 분이 찾아오셨어요. 교회 재산만 놔두고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면 살 수 있다고 귀띔을 해주더라고요. 목사를 그만두는 한이 있어도 그럴 수는 없다고 했죠. 노회에서 힘이 좋으신 목사님이 파견되어 물리적 충돌을 유도하는 거예요. 그리고 교인들이 폭력을 썼다고 형사고발을 하더라고요. 경찰서에 불려가 조서도 받았지요. 변호사 비용 등 경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갑자기 취하할 테니 협상을 하자는 거예요. 이미 불미스러운 고발사건으로 인해 매입한 대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요. 그때도 선배님 생각이 났어요. 일이 잘되거나 재물이 모이면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몇 차례 경험했거든요.

그뿐만 아니에요. 10년 후에 2천여 평 대지 위에 교회당을 건축하게 되었어요. 수백억에 달하는 재산이 된 셈이죠. 이미 터득한 터라 ‘우리 교회는 이 재산이 화근입니다.’라고 자주 경종을 울리며 재단법인으로 등재했거든요. 노련하신 장로님의 부탁도 있었고, 언젠가는 사유재산이 될 염려도 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도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전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어요. 성경에도 죽음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인다고 했잖아요. 그 후로 교회에 돈을 모아 놓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답니다. 돈이 모이면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반드시 발생하기 마련이니까요. 선배님! 이해하시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편히 주무세요.



2021년, 동역자였던 후배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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