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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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2-15 11:1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정 목사님께


성경을 통해 범사가 감사해야 할 일임을 깨달았어요


목사님! 헤어진 지가 20여 년이 넘었나 봐요. 목사님이 설립한 ‘의료선교회’에서 20여 년 동안 총무로 일하던 직원이에요. 가끔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해외에 나가셔서 의료선교사업에 열중하고 계신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개서한을 드리게 되었어요. 목사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거든요. 제 생애에 있어서 참으로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언젠가는 목사님을 직접 찾아뵙고 진지하게 말씀을 드리려고 했지요. 이제 늦게라도 지상을 통해 공개서한으로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을 전하려고 해요.

1970년 10월, 서울에서 결혼한 후, 마침 과거 신학교 학창 시절에 교수였던 스승 목사님의 배려로 교육전도사 일을 맡게 되었지요. 미련이 있어 버리지 못한 계몽사상이 알게 모르게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잖아요, 그로 인해 학생들이 사모님의 말씀에 반항했다는 거예요. 교수 목사님의 마음에 불쾌감을 드리게 된 거죠. 책임을 지려고 사임 의사를 말씀드리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지요. 교수 목사님은 안타까워하시며 거액의 돈을 현찰로 빌려주시면서 대책을 마련해보라고 격려해주셨어요. 끝내 자비량으로 계몽운동을 하기에 적당한 일거리를 찾다가 사기를 당하고 말았거든요. 경험이 없는 촌뜨기에게 당연히 찾아온 결과잖아요.

1972년 3월, 서울에서 모든 것을 접고 밤 열차로 귀향길에 올랐죠. 고향에서 지난날 계몽운동의 잔재들을 추슬러 다시 활동을 시작했어요. 낙향해서 농촌 계몽운동에 진력하게 된 거예요. 서울에서 몇 년 신학을 해보았어도 의혹만 더 증폭되고 문제의식만 깊어질 뿐이었으니까요. 가족들은 물론 근동 마을 주민들 보기에 부끄럽고 창피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상황을 무릅쓰고 일념으로 농촌 계몽운동에 진력하고 있었거든요.

그해 11월, 정 목사님께서 저를 다시 서울 근교 신도시 시민이 되게 하셨죠. 천막촌이지만 교회당과 사택이 있는 개척교회를 돌보게 하셨잖아요. 교회당은 청계천 주민들이 임시로 거처하는 천막촌 언덕 외딴곳에 있었고요. 다시 시작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상경하기 전에 많이 망설이다가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수도권에서 계몽운동을 하려고 상경하기로 했어요. 다시 풍운의 꿈을 안고 자비량이나 다름없는 계몽운동을 겸한 목회 활동을 시작한 셈이죠. 생의 동반자는 무료 유치원을 개설하여 활동하고, 저는 뒷바라지를 하며 열심히 성경을 연구해서 10여 명 성도에게 가르쳤어요. 소문을 듣고 더러 찾아오는 성도들이 점점 늘기 시작했지요.

몇 개월 후, 정 목사님은 저를 의료선교회 총무로 일하도록 배려해주셨고요. 선교에 동참한다는 뜻에서 매일 출근하며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했죠. 때로는 선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알면서도 혹시 생활비나 용돈이라도 주시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도 하면서 총무 일을 했거든요. 공교롭게 교통비가 떨어지면 방문하는 회원들이 고맙게도 주머니에 촌지를 넣어주곤 했어요. 그런가 하면 유치원 학부모님들과 성도들도 생활이 어려운 중에도 정성을 모아 사례를 하더라고요.

1974년 3월, 이른바 명문대학 신학연구원에 입학해서 성경은 물론 신학 연구를 다시 하게 되었죠. 목사님도 아담한 교단의 총회장으로 봉사하시며 신학교를 경영하셨잖아요. 학감이라는 직책도 맡겨주시고 교의신학 교수직도 맡겨주셨지요. 전교생이 거의 장학생이나 다름없어 보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고요. 어느 날 선교회 사무실에 자주 찾아오시는 저명하신 목사님이 교회 전도사로 봉사할 의사를 조심스럽게 타진하시더군요. 그때, 의리냐! 현실이냐! 고민과 갈등이 없을 수 없잖아요. 의리를 생각하면 목사님과 동고동락을 해야 하고, 현실을 생각하면 매달 정해진 생활비를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교회 전도사로 가야 하니까요.

여러 날, 의리도 지키고 현실도 타개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았으나 헛수고였어요. 하는 수 없이 선교회 총무 일만 틈나는 대로 돕기로 약속한 후, 학업을 계속하려고 타 교회 교육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죠, 그 결과 신학연구원의 남은 4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되었잖아요. 바로 하나님께서 저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죠. 물론 모든 만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이미 믿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실제 경험은 더 피부에 와닿거든요. 바로 이때가 제 생의 방향이 ‘계몽운동’에서 ‘말씀운동’으로 바뀌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답니다.

천막촌교회를 떠나면서 자세한 말씀도 드리지 못했기에 많은 오해를 하셨을 거예요. 생활이 어렵거나 학비가 없어서일까! 무슨 오해나 섭섭함이 있어서일까! 사실 많은 생각을 하실 거라는 예감은 했었죠. 그러면서도 말씀드리면 혹시 변명으로 들리거나 치졸한 어리석음만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요. 선교회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요. ‘언젠가는 말씀드릴 기회가 오겠지!’라고 하며 세월만 보내고 있는 동안 천국에서나 뵙게 되고 말았네요. 선교지에서 잠드셨다는 소식에 놀라고 너무 아쉬웠어요. 국내 아늑한 산속에 자리 잡은 조용한 안치소를 찾아 눈시울을 붉혔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사회 경험이 부족한 촌뜨기에게 도시 생활의 준비를 위한 ‘사회학’ 공부를 거저 시키신 것으로 믿고 있어요.

결국, 인간이 고민하고 오해하고 갈등하며 서로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결과임을 알게 되었거든요. 성경을 통해 범사가 감사해야 할 일임을 깨달았어요. 그 후, 생각이 완전히 바뀌더라고요. 밉거나 싫은 사람이 없어지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 자신의 인생관과 역사관 또는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게 되어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살게 되더라고요. 하나님께서는 자비량 목회를 하려는 저의 마음을 견고케 하시려고 목사님을 통해 많은 연단을 시키신 것으로 분명히 믿고 있어요. 어쩌면 목사님이 한동안 제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안내자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하거든요. 혹시 오해했거나 섭섭하셨다면 너그럽게 생각하고 모두 잊으세요. 부디 주님 재림 때까지 편히 주무세요.


2022년, 조용히 떠난 직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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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목사님께
김 학장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