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뉴스

 
작성일 : 19-04-17 19:0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2019년 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


‘교회와 국가’ 주제로 지난 13일 개최 … 반(反) 기독교 국가의 지배가 한국에서의 ‘기독교민족주의’ 형성케 해
banner

13 ѽŴб 2հ ī Ȧ ȸ 2019 ȸ мȸ ̻ ڻ簡 ǥ ϰ ִ.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교계, 학계 등 각 분야에서 연구한 논문을 통하여 그 당시 역사적인 사실과 의의를 재조명하는 행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에 개혁신학회(회장 이광희)도 지난 13일 총신대학교 제2종합관 카펠라 홀에서 ‘교회와 국가’라는 주제로 봄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주제발표자로 나선 이상규 박사(고신대 명예교수, 백석대 석좌교수)는 ‘한국기독교와 민족, 민족주의’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이 박사는 한국인들이 ‘민족’이라는 단어에 대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민족이 처했던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라며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하에서 민족정신과 교육 그리고 문화를 강조하며, 이것들을 지키기 위해 총독부와 맞섰다고 했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정황 때문에 민족, 민족문화, 민족문학, 민족음악, 민족민주운동 등은 낯익은 주제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최근에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민족적 동질성 주장은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처럼 민족은 정치적 균열을 규제하는 상위의 기준으로 부상했는데, 이런 민족 개념의 부상은 탈식민화(post-colonialism)의 도정에 오른 한국근현대사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 민족주의의 대두는 일제하의 상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며,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민족주의 3가지 유형 혹은 노선으로 지적되고 있다고 했다. 그 첫 번째는 근대화운동, 선진문명을 받아들임으로써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개화 지향의 민족운동과 두 번째는 보수 근왕(勤王)운동으로서 신흥자본주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위하려는 충의사상(忠義思想)에 기초한 민족운동, 세 번째 동학운동에서 나타난 민중봉기는 봉건적 특권계급에 대한 거부인 동시에 외세 침투에 저항하는 제3의 노선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3가지 유형으로 구분은 가능하지만 ‘근대지향’과 ‘민족보존’의 두 노선으로 요약할 수 있다며, 양 측면을 통합적으로 인식한 것이 ‘자강 민족주의(self-construction nationalism)이라며, 우리의 것을 보수하되 선진문명을 받아들여 국제적인 정치질서의 냉엄한 현실에서 민족의 자강을 추구하는 자강민족주의가 대두되는데 이에 적절하게 응답한 것이 기독교, 기독교회, 기독교 선교사들이었으며, 개화지향은 개신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요인이 되었고 이것이 소수의 엘리트 그룹들의 기독교 영입운동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그는 계속해서 ‘한국교회의 정치 사회적 환경’이라는 소주제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실체 혹은 현상은 서구 문화의 주체로서의 ‘기독교’와 조선침략 세력으로서의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정치 지형이었다, 이 두 실체의 상호관계는 한국의 근현대사 해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면서 한국 기독교의 민족, 민족의식, 민족주의 배경이 되었다”고 밝혔다. 민족의 시련기이자 역사의 격변기였던 19세기말 개국(開國)과 개항(開港)의 문제는 외면할 수 없는 역사의 숙제였던 시기에 작은 변화 즉 새로운 대외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기 시작했고, 강화도 조약 이후 일제의 군사적 침략의 발판을 제공하게 되고 개국은 결국 기독교 선교를 가능하게 했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선교사들의 왕래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외국과의 조약에서 종교의 자유나 기독교 선교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나, 개항은 기독교의 전파를 가능케 해주는 역사의 전기(轉機)였다고 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수적 성장이 보고된 것은 청일전쟁(1894~5) 이후 처음이며, 피선교국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급성장한 교회로 알려져 있다며, 외래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었던 전통과는 달리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나라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특히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화되고 청일전쟁, 노일전쟁으로 국토가 유린당하고 민족이 수난을 당하는 그 고난의 시대에 한국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자료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청일전쟁이 발발하던 1894년 수세자가 236명, 1895년 746명, 1896년 8,496명, 1900년 18,081명으로 격증하였고, 또 다른 통계에는 1895년 530명이었으나 1905년에 26,057명으로 10년 사이에 500% 성장한 것으로 보고 되었으며, 1920년 92,510명, 1930년에는 125,479명으로 성장하였고 해방 당시는 약 3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갑작스러운 수적 성장에 대해 이 박사는 “청일전쟁이 끝난 이후 사회, 정치적 환경이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 당시 조선은 비무장한 채로 냉엄한 국제 정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런 민족의 위기에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전파되었고 한국 교회는 그 초기부터 민족의 현실에 부응하고 있었다. 어떤 점에서는 한국의 교회는 민족의 역사와 고난의 여정과 함께해야 할 부름을 받고 있었다”고 했다. 연이어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수용과 급성장에 대한 논의에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기본적 전제는 한국은 아시아, 아프리카제국의 많은 나라와 달리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나라는 기독교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지 않고 반 기독교적 국가인 일본에 지배를 받았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과 교회는 쉽게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는 독특한 민족주의를 발전시켰다고 했으며, 그것이 바로 기독교적 민족주의였다고 했다. 기독교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나라에서의 민족주의는 대체로 반기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했다. 이에 대표적인 나라 인도네시아를 예로 들었다.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는 340년 동안 화란의 지배를 받으며, 두 가지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첫째는 반 외자(外資)운동과 반 기독교운동이었다고 했고, 기독교국가의 식민통치하에 있었던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반민족 행위였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신앙 안에 민족적 과제를 수용하였고, 교회는 민족과 유리된 배타적 집단이 아니라 민족의 아픔과 고난의 동반자였으며, 기독교 신앙은 반일적 국민의식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하였고, 반일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 박사는 이와 같이 기독교와 민족이 결합하여 ‘기독교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를 형성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런 특수한 상황이 1910년 이후 한국에서 기독교 수용을 보다 용이하게 했다며,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결합되고, 민족주의가 기독교 수용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독특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이런 현실은 후일 한국기독교의 자기표현과 정체성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이 박사는 추가로 ‘민경배 교수의 민족 교회론’과 ‘주기철 목사와 민족주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2019년 개혁신학회 가을 학술대회는 10월 12일 개최할 예정이며, 장소와 자세한 일정은 추후에 공지할 것이라고 전했다.

편집팀

기독교지도자협의회, ‘전통신학과 성경신학의 대화’ 포럼과 말씀운동사경회 열어
제7회 기독교지도자협의회 포럼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