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7-05-25 19:4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식 죽는 법 : 제때 죽어라?


죽음이란 생물의 생명이 끊어지거나 없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부모와 자식의 죽음, 친구와 연인의 죽음, 이제는 인간처럼 장례를 치르는 반려동물의 죽음까지 우리는 나 혹은 타자(他者)의 죽음과 항상 함께 한다. 살아있기 때문에 언젠가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삶의 동반자처럼 다가서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지금 분명히 살아있다는 확신은 동시에 죽음도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는 증거가 된다.

생명이 없어진다는 것은 반드시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분명한 사실은 바로 생생한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었다는 말은 분명히 살아있었다는 말을 다시 강조하는 말이 된다. 임종에 임박해서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직은’ 산 자의 마지막 모습을 우리는 경험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분명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는 우리도 따지고 보면 살아간다는 말도 되지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무 힘들어 살고 있는지 죽어 가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한다. 죽음과 삶이 얼마나 가까운지 잘 보여주는 예다.

‘신의 죽음’을 외친 니체는 ‘죽음’의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고민한 철학자다. 니체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삶의 관점에서 죽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다루고자 했다. 삶의 관점에서 죽음을 생각하면 죽음은 삶의 반대인 불행한 사건이 된다. 더 살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 바로 죽음이다. 그런데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생각하면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을 철저하게 ‘준비’하는 기회가 된다. 특명을 부여받은 특공대원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작전을 펼치지 않는다. 그에게 남아 있는 삶은 죽음을 더욱 철저하게 준비하는 계기가 된다.

사는 것이 목적이 되면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되며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삶을 만들어낸다.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죽음이라는 필연적 상황을 도피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죽음이 목적이 되면 삶의 순간은 죽음을 준비하는 소중한 기회로 이어진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또 다른 무엇을 기대하지 않는다. 니체는 이러한 관점에서 서양 기독교를 비판한다. 서양 기독교는 변화무쌍한 현실을 수용할 수 없는 나약한 자들 혹은 죽음을 현실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비겁한 자들을 부추겨 죽음 이후의 세계를 날조했다고 비판한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심에만 사로잡혀있는 자들은 오직 살아남는 것에만 몰두한 나머지 죽음을 죄악시하고 죽음 이후의 또다시 ‘살고 싶은’ 나머지 저세상을 날조해 낸다. ‘저세상’에 대해 강조할수록 이 세상은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

이처럼 니체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뒤집어 생각했다. 살고자 하는 욕심에서만 죽음을 생각하면 죽어가는 현실은 부정적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죽어가야만 하는 필연적 과정에서 삶을 생각하면 죽어가는 현실은 죽음을 잘(?) 준비하는 기회가 된다. 그 결과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현실의 삶이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다시 날조할 필요가 없다. 사후 세계의 날조를 차단하고 현실을 현실대로 받아들이고 다가오는 죽음도 철저하게 긍정할 수 있도록 하는 ‘죽음 중심의 삶’, 이것이 니체식 죽음의 철학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손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니체는 또한 저세상의 주인처럼 날조된 신을 죽여버려야 했다. 제때에 제대로 죽기 위해 니체는 현실의 죽음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방해하는 저세상의 신을 죽여야만 했다. 이것이 니체철학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신이 죽었다’는 그의 선언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외친다.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KSA 4, 93~96쪽) 죽은 법을 배워야만 제때에 제대로 ‘잘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다. 현실을 죽음의 과정으로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죄악시하면서 ‘저세상’이라는 보험금을 탈 수 있다는 날조된 망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니체식으로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은 죽음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열어줄지는 몰라도 왜 그때 그런 방식으로 죽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근본 물음은 해결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니체의 말대로 ‘운명을 맹목적 사랑하는’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 운명론적 태도는 죽음의 의미를 더 이상 묻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굴레이며 속박일 뿐이다.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재확인해 주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계속해서 묻고 있다. ‘왜 나는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가?’ 니체식으로 본다면, 그렇게 자꾸 의미를 묻지 말고 죽게 되면 그냥 그대로 원망 없이 죽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또 다른 방식으로 강요하는 헛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제때에 잘 죽어가는지 알 수 없다. 니체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줄 수도 없고 우리가 니체에게 말해 줄 수도 없다. 11년간 정신병자로 누워서 죽어갔던 니체는 제때에 제대로 자신이 죽어가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자신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 성경에는 ‘마르다’라는 여인이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은 사실에 대해 예수님께 원망하듯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함께 있었다면 자신의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오빠는 제때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제때에 제대로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계시기 않던 그 시간에 바로 그렇게 죽어야만 예수님이 생과 사의 결정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구속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5~27).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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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란 부모님의 뜻을 받들고자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