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9-02-12 19:2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열여섯. 성경권위가 독일의 종교개혁을 일으키다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 9:24~27).


인용한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술에 취한 아버지 노아에게 셈의 동생 함이 했던 행동에 대해 술이 깬 노아를 통해 인류의 미래 역사를 예언한 내용이다. 가나안으로 불린 함의 후예들은 두 형제 셈과 야벳의 종이 되며 셈의 후예들은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야벳은 창대하지만 셈의 거주지에 거하며 함의 후손을 종으로 거느린다. 성경적 문화사관 혹은 기독교 역사관에 의하면 노아가 받은 이 언약에 따라 세계 역사는 이러한 구도를 따라 진행해 왔으며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며 분명 그렇게 갈 것이다. 한국 교회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성도라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권위가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 의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지난 호까지 몇 호에 걸쳐 창대한 야벳의 후예인 자칭 제3 로마라 불렀던 러시아의 역사를 근대와 현대 초기까지 잠시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서유럽으로 돌아가 성경의 ‘참지혜’가 어떻게 서유럽의 창대함을 이끌었고 그리고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동했는지 그리고 동양으로 또한 한국으로 이동하는지 그 경로를 살펴보고자 한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중북부 작센주 베틴 가문(家門)이 지배하는 비텐베르크 교회 대문에 수사(修士)이자 대학 강사였던 마틴 루터는 로마 교황을 향해 95개 조 반박문을 못으로 박았다. 로마 가톨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일에 최초로 세워진 대학이 비텐베르크에 있었으며 그 대학 설립자 프리드리히 선제후(選帝侯)는 그 대학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당시 가장 유행했던 인문주의(人文主義) 발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자유롭게 새로운 이론을 개진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당시 로마 가톨릭 수사였던 루터의 신앙은 인간 무능과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적 배경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조장하는 당대의 인간중심주의인 인문주의와 대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황청에서 볼 때도 하나님의 은총은 반드시 교황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주장도 반대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강의에서 루터는 획기적인 수업 방식을 도입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주석을 가르치지 않고 학생들에게 ‘여백 성경’을 나누어주면서 자신이 직접 주석하도록 하면서 성경 강의를 진행했다. 로마 가톨릭의 주교나 신부에 의한 칭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 선언과 함께 시작하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루터는 로마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교황권위가 아닌 성경권위, 인간 공로가 아닌 창세전 예정론은 루터 구원론의 ‘심장부’가 되었다.(399쪽 참조) 그 유명한 (하박국 2:4의 성취로서) 로마서 1:17(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의인(義人)’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살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이렇게 예정론과 이신칭의에 기초를 둔 구원론은 당시 유행했던 인간의 공로를 조건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근대의 길(via moderna)’로 일컫는 ‘계약사상’과도 결별을 뜻한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500년 전 1517년 10월 31일 독일에서 발발하는 성경권위 회복운동이 바로 유럽의 종교개혁이다. ‘유럽’의 종교개혁이라고 특칭(特稱)하는 것은 그 개혁이 한계를 가지고 있고 성경권위를 확증하기에는 ‘미완’의 기획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한계를 극복하고 성경권위를 성경 자체로부터 확증한 이론체계로서 ‘성경신학(Park's The Bible Theolopgy)’을 소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www.ibt.or.kr)
우선 루터 이후 유럽의 종교개혁 사상들을 어느 정도 개관한 후 하나님의 말씀 절대진리로서 성경의 권위가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를 통해 어떻게 확증되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미완’의 의미는 성경권위 확증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앞으로 논의의 초점도 여기에 맞추고자 한다. 사실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권위가 확증되지 않으면 ‘만인제사장’ 교리나 ‘이신칭의’ 교리도 완결될 수 없다. 만인제사장 교리는 현재 한국 교회에서는 ‘목사의존교리’로, 이신칭의 교리는 ‘기복적 공로주의’로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500년 전 루터가 신학생들이 스스로 성경을 공부할 수 있도록 안내한 것이 점차 모든 성도 스스로 성경을 볼 수 있는 성숙의 길을 열어놓으려는 것이었다. 현재 한국 신학계와 교계의 경우 성경권위를 확증하여 성경 교사로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려는 신학 교수나 목사의 역할은 점점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종교개혁 이전 암울했던 중세 말기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한때 인구 사분지 일 규모의 ‘천만 성도’를 자랑했던 한국 교회가 성경권위 회복에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차라리 문제 제기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더 편하다. 한국 교회는 성경 진리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무늬만 기독교라는 사실은 폐부를 찌르는 마음 아픈 진단이다.   
연옥교리를 만들어 지옥에 간 자도 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중보기도를 위한 특별한 연옥교회(챈트리)까지 만들었던 것이 루터 당시 부패한 로마 가톨릭이었다. 루터는 이 가공할 거짓말을 폭로했으며 그래서 ‘면죄부’ 매매 행위를 근절하는 운동을 펼쳤다. 마치 천국행 열차를 탈 수 있는 ‘공인인증서’ 마냥 면죄부 문화는 사실 유럽 기독교에 아직까지 뿌리 깊이 박혀있는 대표적 상징이기도 하다. ‘이신칭의’는 말뿐인 경우가 허다한 현대 전 세계의 기독교계를 바라보면 앞으로 면죄부 방식으로 ‘구원흥정’을 위한 매매 행위가 더 성행할 것으로 짐작된다. 이 모든 것이 유일한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 ‘성경권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면죄부를 팔아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다시 짓고자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종교를 빙자한 사기꾼들이었다. 그것을 폭로하면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온 우주의 통치자인 로마 교황권에 도전하는 반역행위가 된다. 로마 교회가 오류가 없다는 말은 루터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으며 95개 반박문에 로마 교회의 허다한 오류들을 적시하여 독일 전역에 배포했다. 중세 스콜라 신학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예정론’을 사용하기는 했다. 하지만 성경에 명시된 예정론 진리가 로마 교황과 종교기득권 세력들에게 권력을 유지하기에 불리한 이론이 되고 예정론이 자신들의 허구와 거짓을 폭로하는 근거가 되자 예정론을 적극 주장하는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을 박멸하고자 했다. 현대 개신교도 마찬가지 경우다. 창세전 하나님의 은혜인 ‘예정(豫定)’으로  시작하는 많은 성경 교사들도 결론은 인간이 뭔가를 더 해야만 구원에 이르고 천국 간다고 하는 자들이 많다. 큰 틀에서 보면 중세 로마 가톨릭의 부패한 종교 권력이 자행했던 범행과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성경권위를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고 성경 진리를 단지 자기 욕심과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거짓 지도자들의 전형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며 결국 속고 속이며 스스로 소경이 되는 길을 자처하는 비참한 결론을 맞는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루터로 하여금 성경진리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고백을 당당하게 선언하게 하셨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가 주관한 보름스 제국의회 공식청문회에서 루터는 교황에 이의를 제기한 모든 책을 철회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했다. 물론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의 종교개혁 운동은 불타올랐다. 하나님께서는 루터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했다. “제가 이 책들을 철회한다면 제가 성취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독재에 힘을 보태는 것이고 이 흉측한 불신앙에 창문 대신 대문을 그 어느 때보다 활짝 열어주는 것일 뿐입니다.”(앞의 책 406쪽)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의 운동력(히 4:12)이 루터가 황제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도록 인도셨다. 이 청문회 후에 루터는 신약성경을 자국어 독일어로 먼저 번역했으며 그 후 구약도 번역할 수 있었다. 그리고 1524년에는 찬송가도 출판했다. 그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도 그 찬송가 수록곡이다.
이 무렵 중앙 유럽에는 루터의 교황 절대권력에 대한 도전에 자극을 받아 지주(地主)에 대한 농민들의 전쟁인 ‘농민전쟁’이 발발했다. 그런데 루터는 농민들이 자기 권리를 찾으려는 이 전쟁에 반대했으며 로마서 13:1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구절에 근거하여 농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한 군주들 편을 들었다. 농민들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루터처럼 농민을 잔인하게 진압한 군주들에 대해 손뼉 칠 일도 결코 아니다. 세상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이 세상 권세가 백성들을 잔인하게 죽여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권력자가 백성을 죽여도 좋다는 것은 하늘나라 통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성경 교사로서 루터의 그러한 군주옹호론은 성경적으로 정당화하기는 매우 어렵다. (교회와 세상권력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른 기회에 살펴볼 것이다)   

본 기획의 목적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공과(功過)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유럽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하나님의 말씀 성경권위의 ‘지혜’(sophia)가 얼마만큼 유럽 기독교를 통해 성경중심적 기독교 문화를 꽃피웠는지 교회사의 명백한 증거들을 통해 살펴보고 동시에 그 성경권위가 어떻게 동양으로 그리고 한국까지 이어지는 지혜 대이동의 드라마가 일어났는지 살피고자 한다. 지난 번 근대와 현대의 러시아 역사를 통해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제 다시 중세 이후 유럽의 종교개혁 시대와 근·현대 유럽 교회사로 돌아가서 소피아(지혜)의 이동과 관련된 역사를 ‘성경권위’ 중심으로 살피려는 것이다.
<172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사랑(어짊)에 뜻을 두면 악해지지 않는다
군자는 어짊(사랑)을 오래도록 즐기고 실천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