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9-05-09 19:1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마틴 부처와 토마스 크랜머 그리고 존 칼빈


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48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세워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으며 49 왕이 또 다니엘의 청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도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단 2:47~49).

위의 본문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망한 조국 남유다에서 포로로 잡혀 와 바벨론 제국의 통치자들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 언어와 문화를 익혀 왕궁에서 느부갓네살왕의 종노릇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바벨론 박사들이 할 수 없었던 왕의 꿈 내용과 그 내용의 해석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어린 다니엘이 풀고 난 후 바벨론 박사들의 어른 즉 포로의 신분으로 제국의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남유다가 범죄한 이유로 처참하게 멸망당한 것이 큰 사건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포로로 끌려온 소년이 제국을 통치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 지배하던 중세 천년 암흑기 유럽에서는 그 어디에도 하나님 말씀의 그루터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존하시는 하나님은 하늘에서 창세전에 정하신 때가 되었으므로 능력의 말씀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그리고 곳곳에서 준비된 진리의 종들을 사용하여 유럽의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하셨다. 아래에서는 말씀의 운동력이 사로잡았던 세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1517년 일어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 중부와 북부는 물론 다른 서유럽에도 빠르게 확산했다. 당시 위치로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중부에 해당했고 현재는 독일어 사용이 가능한 프랑스 영토가 있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이다. 사실 이 도시는 16세기 중엽 종교개혁에 동참하는 개혁가들에게 매우 관심이 높은 도시국가였다. 그곳을 유명하게 만든 한 명의 인물이 있었는데, 종교개혁 운동에 뛰어든 전직 도미니크회 수사였던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였다. 부처의 탁월한 중재력으로 많은 개혁가들이 그 도시로 모여 들었다. 종교개혁가들과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을 중재하려고 했는가 하면 사회적 혁명을 도모하려는 급진주의자들을 설득하는 데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후에 존 칼빈은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바로 스트라스부르의 마틴 부처를 찾아왔으며 향후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 통찰을 얻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유럽 문화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는 곳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곳이 미래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냐하면 이 도시에서 마틴 부처는 종교개혁 사상은 물론이고 인문주의와 르네상스도 적극 수용함으로써 그 이념들의 중재자 노릇을 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개혁가들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향후 유럽 종교개혁의 여러 가지 색깔을 만들어 내는 데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향후 신학적 자리매김을 하는 개혁주의(칼빈주의)는 물론 영국 국교, 루터주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능력은 스트라스부르가 교황주의자로서 반종교개혁가였던 신성로마 황제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그 모든 가능성은 일순간 사라져 버린다.

마틴 부처는 그 길로 영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그는 그곳에서 영국을 유럽 종교개혁 중심지로 만들려는 개혁가들과 만났다.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다. 최초 프로테스탄트 캔터베리 대주교(1533~56)이며 정치가였던 크랜머는 독일 루터파와 마틴 부처의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 영향을 받고 영국 국교회의 예배 모범인 『공동기도서』를 작성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영국을 넘어 서방 기독교 전체의 예전(禮典)으로 남아있다. 한때 독일의 루터파 교회를 순방하기도 했고 루터파 신학자의 딸과 결혼했을 정도로 그의 기도서는 가톨릭적 예배 의식적 경향이 매우 짙다. 크랜머의 이 ‘기도서’는 영어권 사람들에게 셰익스피어의 연설과 독백보다 훨씬 더 자주 암송된다고 한다.(435) 이러한 기도서를 작성하면서도 크랜머는 로마 가톨릭의 교회 음악은 매우 경멸했다. 영국 국교회만의 독특한 예배의식 문화를 만드는 데 부단히도 노력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로마 가톨릭과도 다르고 개신교와도 다른 것이 영국의 성공회라고 할 때 바로 그 기원이 되는 인물이 토마스 크랜머다. 하지만 이렇게 종교개혁 정신으로 독특한 영국 국교를 만들고자 했던 크랜머도 많은 종교개혁자들처럼 로마 교황의 추종자였던 여왕 메리에 의해 화형대의 한 줌 재로 사라졌다. 메리 여왕 앞에서 혹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치욕적인 종교개혁 철회를 몇 번이나 거듭했지만 결국 화형 직전 그는 교황 권력은 그리스도에 대한 찬탈이며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은 거짓 행위임을 부르짖고 사라졌다. 여왕 앞에서 살기 위해 몇 번이나 종교개혁 철회장에 서명했던 오른손을 ‘죄지은 오른손’이라 저주하며 화염 더미 속에서 끝까지 태웠다는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마틴 부처가 스트라스부르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전개할 때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전개하다 일시 추방당했던 칼빈은 제네바 시민들의 다급한 요청으로 제네바로 다시 돌아와 개혁 운동을 더욱 분명하게 추진한다. 그럴 때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경험했던 교회개혁의 핵심인 인적 쇄신의 카드를 제시한다. 로마 가톨릭의 전통 제도였던 주교, 사제, 부제의 조직이 아닌 목사, 교사, 장로, 집사라는 네 가지 직제(職制)를 만든다. 목사가 성도를 돌보는 이른바 목회라면, 교사는 성경 교사를 말한다. 그리고 특징적인 것은 칼빈은 목사와 성경 교사의 연구모임인 ‘목사회’(a Company of Pastors)를 구성했다는 점이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마틴 부처를 만나서 경험한 핵심은 로마 가톨릭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개혁은 ‘성경공부’였으며 그에 바탕을 둔 신학체계의 정립이었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칼빈 사후에 등장하는 소위 ‘칼빈주의’는 칼빈이 시작한 성경에 대한 권위를 더욱 선명하게 확정하기보다 칼빈을 교조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말씀의 운동력은 이미 시작한 루터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을 또다시 마틴 부처와 토마스 크랜머 그리고 존 칼빈을 몰아서 종교개혁의 핵심이 무엇이어야 하며 어떻게 해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완전한 개혁이 가능한지 고민하게 하며 때로는 화형대에 세우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도록 하셨다.

<176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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