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1-12-22 09:5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가장 객관적이므로 가장 허구적인 철학: 피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수가 없이는 어떤 앎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수는 진리가 아닌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로지 수만이 사물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합니다. 모든 것은 한정되었거나 한정되지 않았거나 또는 둘 다여야 합니다. 그러나 한정됨 없이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수는 시간과 공간에 대상을 결정짓는 인식의 도구다. 어떤 대상의 정체는 수의 질서를 따라 설명할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렇게 함과 동시에 한정할수록 한정할 수 없는 대상이 더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백을 해야 한다. ‘a²+b²=c²’는 직각 삼각형의 공리일 뿐 어떤 다른 도형을 설명하기에는 쓸모가 없는 기호다. 즉 다른 도형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직각 삼각형의 공리이다. 이런 점에서 대상에 대한 규정은 다른 수많은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열어 놓게 한다. 대상을 한정하여 명확하게 규명하는 진리를 수학이 추구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수학의 정확성이란 극히 부분적인 표현일 뿐이며 그래서 세계를 수학적으로 설명하겠다는 의지는 그야말로 오만의 극치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수(數)를 통해 만물을 설명하려는 의도는 그 자체 허무한 정열에 불과할 수도 있다. 소리의 세계까지 수학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시도(화성학)는 허구 중의 허구인 셈이다. 니체는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의 말을 인용해 수(數)를 통해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음악을 이렇게 설명한다. “음악은 자기 자신을 헤아릴 줄 모르는 정신의 은밀한 산수 연습”(434)이다. 수학적 비율로 화음(和音)의 정교함을 나타내는 시도는 단지 내용(대상)은 상실한 채 수의 배열에 나타나는 형식미의 노예일 뿐이다. 어떤 대상을 정확하게 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동시에 어떤 대상도 한정할 수 없다는 자기모순에 의해 자기 함정을 만들어 그곳에 매몰당하는 것이 수(數)를 통한 세계 설명의 시도인 셈이다. 굳이 오늘날 디지털 코드에 의한 대격변의 시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미 이천 오백여 년 전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현실과 가상(假想), 실재(實在)와 허구(虛構) 사이에서 너무도 정교하지만 너무도 수의 형식에만 매몰당하는 처절한 사유를 하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소크라테스는 자연과학이나 천문학 그리고 기하학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으며 실용적 차원에서 활용할 뿐이지 그 자체로 탐구하는 것 자체가 무가치하고 ‘미친 짓’이라고 보았다.(437) 물리학은 배운 바도 없으며 예술 영역은 그저 실제적 삶을 살아가는 데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보태는 정도로 보았다. 그리스 비극에 대해서도 경멸적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오직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 의한 윤리적 삶에 몰두한다.
내면에 본래 주어진 덕성(德性)의 완성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이론과 실천을 도덕적으로 합일(合一)을 이루는 삶을 추구했다. “사유에 의해 지배되는 삶!”(439), 모든 생각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도덕적 행위로 실천할 수 있을 때 건전한 지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결과에 결부되지 않는 모든 인식에 대해 적대적”(440)일 수밖에 없었다. 철학은 모든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덕(德)’을 기르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의 생각과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수(數)로 환원하려는 피타고라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소크라테스의 눈에는 이론과 실천을 뒤바꿔 생각하는 자들로 보인다. 모든 지식의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는 오직 윤리적 행위로 꽃피울 때 정당하다.
소크라테스는 수(數)의 체계 속에 세상과 인간을 설명하려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시도 대신에 윤리의 원천인 인간의 ‘양심’을 체계화하고자 했다. 그는 순수한 양심을 채굴하기 위해 전통적인 윤리적 관습들을 모두 해체한다. 그리고 양심의 소리에 대한 확신은 신의 음성이 증명해 주었다고 확신한다. 즉 신의 음성은 이렇게 흘러나왔다고 한다. “지혜에 관한 한 아무도 소크라테스와 겨룰 수 없다.” 즉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지혜롭다.”(442) 이 신의 음성을 증명하고자 그는 당대 모든 지혜자를 만났다. 그리고 만났던 자들의 자기 한계와 자기 오류를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면서 자신이 양심을 속이지 않는 지혜자임을 스스로 확신한다. 자신이 만났던 지혜자들과 자신은 “무엇이 선하고 명예로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그의 경우 그것을 안다고 믿었던 데 반해 나는 나의 무지를 전적으로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이지요. 이러한 방식으로 나는 그보다 지혜로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근본 오류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지요.”(443)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는 소크라테스가 확신한 양심의 소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 소리가 모든 인류가 받아들일 수 있는 동일한 양심인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과연 인간이 자기 무지의 한계를 알 수 있을까? 여기에 소크라테스의 허구와 거짓이 숨어 있다고 본다. 양심의 소리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조직한 불변의 가치라는 허상이다. 가슴에 손을 얹으면 인류의 보편적 지성으로 함께 추구해야 할 양심의 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이것이 자기 무지에 대한 자기 확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 의심을 대신할 비책(秘策)을 고안한다. 자기 소신대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신성한 사명의 존엄성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449)가 필요했으며, 이는 바로 자신의 믿음대로 떳떳하게 죽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 소신대로 죽음을 자초한 자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의 모든 판단과 확신이 모두 같은 양심의 소리를 듣고 한 것인가? 진지하지만 결코 해명할 수 없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무지’에 대한 자기 확신이다. 인간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자신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근본 한계가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진리의 말씀에 의존해 더 깊이 고민해 가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눅 9:33)


<219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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