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1-02-22 21:5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계시의 비밀:바르트 이해의 뜨거운 감자


바르트의 성육신, 동정녀 탄생 이해(Un-derstanding of the Virgin Birth of Jesus Christ)는 뜨거운 감자(hot potato)라고 표현하고 싶다. 권호덕은 「칼빈과 바르트의 동정녀 탄생 이해 비교」(한국개혁신학 41권, 2013년)를 발표했다. 이상웅은 「루이스 벌코프의 칼 바르트 신학에 대한 평가」(개혁논총 25권, 2013년)를 발표했다. 두 연구자는 바르트에 대해서 좀 유연하고 긍정적인 관점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두 연구자는 바르트에게 전통적인 성육신 개념이 있다고 평가한 것으로 필자가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바르트 학회의 연구자들도 바르트의 성육신 이해는 전통적인 성육신 이해로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메이천 박사의 『그리스도 동정녀 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 1930년)이 좋은 기준점이라고 생각한다. 정규철 박사께서 번역하여 2018년에 CLC에서 출판되었다. 메이천 박사의 제시가 쉽지 않듯이, 바르트의 제시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메이천 박사는 자유주의가 부정하는 성육신 이해를 변증하기 위해서 변호하며 신학을 집필했다.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을 긍정할 수 있는 기쁨의 교리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는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은 계시의 표적을 제거하는 자연신학적 시도로 평가했고 함께 로마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숭배론을 비판했다.
먼저 “동정녀(마리아) 탄생 교리”를 마리아와 관련시키는 것은 신학에 대한 이해와 태도가 결여된 것을 밝히는 것이다. 431년 에베소 공회의에서 논쟁은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나님의 어머니)와 크리스토코스(Christokos, 그리스도의 어머니)의 논쟁이다. 공회의의 결정은 크리스토코스를 정죄했고, 테오도코스를 정통 신앙으로 결정했다. 449년에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에베소에서 회의를 개최해서 431년 한 인격에 두 본성 결정을 철회하고 단성론(monophysitism)으로 결정했는데, 도적회의(robbers council)로 규정되어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제외되었다. 단성론은 451년 칼케돈 공회의에서 배척되었고, 단성론주의자들은 오리엔탈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로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 2014년에 영국국교회는 오리엔탈 정교회와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해에서 진전을 이뤘다는 보도가 있다. 오리엔탈 정교회는 콥틱교회, 아르메니안 사도교회,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등이 소속되어 있다.

우리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격언을 사용한다. 군맹무상(群盲撫象)은 플라톤의 동굴 비유와도 유사하다. “사람은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인식했더라도 부분만 인식한 것이고, 전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부분적인 인식 혹은 진리는 보편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진리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있더라도 사람은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가 불가지론의 핵심 전제일 것이다.

그런데 진리는 그렇지 않다. 진리는 부분 진리와 전체 진리가 차이가 전혀 없다. 그러한 경우는 물리적인 사안에서는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오직 영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는 것은 진리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심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 전체가 아닌 매우 제한적인 부분 지식이다. 그러나 그 부분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전혀 오류나 오작동이 없다. 이러한 체계가 진리 이해에 중요하다. 이러한 말을 좀 장황하게 하는 것은 성육신 체계와 삼위일체 체계의 관계를 제시하기 위함이다.
바르트에게 삼위일체가 있을까? 우리는 앞에서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르트에게 성육신은 없어야 한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런데 “바르트에게 삼위일체는 없고 성육신은 있다”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만약 바르트에게 성육신이 있다면, 바르트에게 삼위일체가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있고, 성육신은 없다”는 명제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부분적 진리를 채용한다면 가능하지만, 진리는 부분 진리가 없다. 부분 진리는 전체 진리이다. 우리는 바르트가 『교회교의학 I/1』에서 삼위일체를 어떻게 해소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탄생”의 문장에 직면했다. 이 문장을 그대로 보면 바르트는 성령으로 동정녀 탄생을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앞부분 제시를 다시 재고하고 철회해야 한다. 두 상이한 명제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지가 있다면 쓰레기다. 학문성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인격적이지 않은 무지를 폭로한 것이다.

성육신 이해,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에 위로부터 기독론, 아래로부터 기독론으로 크게 구분한다. 전통적인 성육신 이해는 위로부터 기독론이라고 한다. 바르트의 이해에서는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에 대해서 양분된 주장이 발생한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위로부터 기독론이라면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 된다. 그러나 아래로부터 기독론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서철원 박사는 바르트의 기독론을 아래로부터 위로의 기독론이라고 제시했다. 그런데 아래로부터 위로의 기독론이라 할지라도 동정녀 탄생을 말할 수 있다. 동정녀 탄생 교리는 그리스도의 무죄성(The Innocence of Jesus)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취하지 않는다(예수에게 죄가 있다)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그것도 정확한 텍스트를 밝힐 것이다.

은혜는 정말 놀라운 것인데, 한 번 부르심으로 구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진리 지식이라도 완전하다. 그런데도 그 지식의 깊이를 사모하며 힘쓰는 것은 칼빈의 표현인 “즐거움(oblectatio/pleasure, satisfaction)”과 “달콤함(suavitas/sweet-ness)”이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존을 위한 방편이고,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구원은 구주의 이름에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주의 이름에 의심이나 불만이 있다면, 찾고, 구하고, 두드리면(ASK) 닫힌 문이 열리며 구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 § 15. “계시의 비밀” 혹은 “신비”에 들어가기 전에 역사적 이해와 주변적 이해를 살펴보았다. 언제든지 관점이 중요하다. 들어가기 전 관점을 확립하고, 들어가서 관점을 보완, 수정, 강화하는 것이 학문 훈련이다. 자기 관점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는 고집쟁이이지 훌륭한 선생이 아니다. 많이 가르치는 자, 먼저 된 자는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칼 바르트를 기독교에 유익이 없고 위험한 인물로 평가한다. 칼 바르트는 예수를 안 믿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즐길 수 있는 좋은 놀이터를 제공한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기독론에서 성경관으로
계시의 기억:폭로된 계시의 현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