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1-06-07 19:5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육신은 아니고 말씀만??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 § 15. 계시의 비밀(Das Geheimnis der Offenbarung) 2. Wahrer Gott und wahrer Mensch

3.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어서 말씀은 이러한 생성과 생성된 존재 안에서도 여전히 자유로우시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는다(KD., 149: CD., 136: GG., 175-176)에서 ‘동치’와 ‘도치’라 번역(신준호 역)된 어휘가 있다. Gleichung(동치): Der Satz "Wahrer Gott und wahrer Mensch" bedeutet eine Gleichung. Aber diese Gleichung ist, streng genommen, unumkehrbar. 참 하나님 그리고 참 사람이라는 진술은 동치를 뜻한다. 그러나 이 동치는 엄격하게 말하여 도치될 수 없다. The statement “very God and very man” signifies as equation. But strictly speaking, this equation is irreversible(KD., 149: CD., 136: GG., 176). Gleichung, equation은 ‘수학방정식’이 기본의미이다. 바르트는 수학방정식에서 역(逆)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동치와 도치라는 번역은 명확한 이해를 갖기 어려운 번역이다. 통상 수학식 1+2=3이고, 2+1=3은 성립된다. 그런데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라는 방정식에서는 역(逆)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참 사람과 참 하나님”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다. Wahrer Gott und wahrer Mensch를 영어 번역자는 true가 아닌 very로 번역하였다.
그리고도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라는 방정식이 언제나 동일하지 않다고 제시했다(GG., 176).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바르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독특성(고유함)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모든 사물에 불확정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당시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가 불확정성의 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 1927년)를 발표하던 때이다. 세상은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환경이지만, 어떤 사이클로 운용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리는 불변하다. 칼 바르트는 불변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평가받는다. 칼 바르트가 생각한 불변은 유일신의 자유와 사랑이다. 기독교가 생각하는 불변은 하나님의 존재, 삼위일체의 “창조(타락)와 구속(심판과 영생)”이다. 칼 바르트에게 기독교 진리는 가변성(Mutatis mutandis)이 있다.
바르트는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315-403)의 글에서 ‘역전(irreversibility)’을 인용한다. 에피파니우스는 이단 반박 연구에 능통한 사역자였다. 에피파니우스는 아리우스를 반대했고, 오리겐과 크리소스토무스의 사상에 대해서도 거부했다. 그러나 에피파니우스가 제시한 문장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이 문장을 역전시키면 “육신이 말씀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 역전이 불가능하다고 그가 제시한 것이다. 바르트는 고대 신학자의 문장을 잘 찾아내어 자기 사상의 근거로 삼지만, 결국 고대사상가의 사상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상의 근거로만 활용한다. 우리 시대의 말로 하면 “자기 본위적 편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바르트는 Logos와 Jesus를 분리하며, 추상적인 예수 경배(예배)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기독론을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제시하면서, 참 사람 부분에 있는 예수 경배를 거부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바르트는 교회 역사에서 예수 경배, 예수가 믿음의 대상이었음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바르트는 계시를 게쉬히테(Geschichte/history)로 본다. Die Offenbarung ist ja Geachichte~. 육체인 예수, 역사적 예수, 신성이 없는 예수로 구분, 분리하는 것이다. 칼케돈 신조(451년)에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은 분할불가하다고 고백한다. 칼케돈 신조는 두 본성(una persona in duabus naturis)이 “혼합 없이(unconfusedly), 변함없이(unchangeably), 분할 없이(indivisibly), 분리 없이(inseparably)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바르트는 육신이라는 술어(predicate)가 힘은 주어(the Subject Logos)인 로고스에 의해서 서고 넘어져야 한다고 제시했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도 교묘한 위치 변경을 시도한다. 서고 넘어짐(steht und fällt/stand and fall)은 교리 문장에 있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바르트는 “로고스의 자유(freien Handeln des Subjektes Logos)”로 교회의 근거를 변경시켰다. 바르트가 기독교 교리(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양성교리) 체계에서 신의 자유로 전환시킨 것이다.
바르트는 합리적 자유주의를 “예수-삶-운동(the Life-of-Jesus movement)”으로 규정하고, 고전적 시도를 “예수-심장-경배(the Heart of Jesus cult)”로 규정하며, 두 체계는 모두 신성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로 접근한 경우로 제시했다(KD., 150: CD., 137: GG., 177).
예수-심장-경배(Herz-Jesu-Verehrung/the Heart of Jesus cult)는 Sacratissimum Cor Iesu(the Sacred Heart) 로마 가톨릭이 창안한 교리 체계이다. 바르트는 이 운동이 Maria Margareta Alacoque(1647-1690, 1675년)의 비전(vision)을 받은 예수회(사제 로베르 드브로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GG., 177). 알라코크(Alacoque) 수녀는 1673년부터 167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예수 성심(심장)의 환상을 체험했다. 그중에 1674년 셋째 환상 체험에서 예수의 발현을 보았다고 한다. 16세기 칼빈은 “예수의 심장”이 아니라 “자기 심장”을 드린다고 고백했다(Cor meum tibi offero Domine).
바르트가 알라코크의 환상 체험(vision)에 근거한 로마 교회의 체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비판하지 않아도 될 사안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르트의 고유의 방식인, 자기 주장을 도출하기 위한 예시에 불과하다. 바르트는 모든 개인 경험을 부정하지 않고 수용하기 때문에 알라코크의 체험도 신의 자유 안에 있게 된다. 다만 그 체험으로 경배의 대상이 무한한 사랑이 아닌 예수의 심장이 상흔에 집착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의 심장 체험 환상을 개인에게 신이 준 고유한 사건으로 해석하고, 상징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국 교회 장로교 초기에 ‘방언’에 대해서 엄중하게 경계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순절주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좀 더 광의적 신학 체계는 칼 바르트에게 있고, 현대주의 영성에 있다. 세속주의 영성 운동에 교회가 견디지 못한 것이다. 기막힌 질문은 “만약 하나님이 그것을 주었다면~”일 것이다. 이런 질문유형은 스스로 착안한 것이 아니라, 칼 바르트가 체계화시킨 사고 유형이다. 이런 형태이면 교회가 수행해야 할 권징(disciple, 경건훈련)도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아닌 개인 스스로 경건훈련을 한다고 주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바르트가 기독교 교리를 독단으로 규정하고, “무한한 사랑의 신”과 직접 교제하도록 주장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바르트는 예수-심장-경배를 로마 가톨릭이 피조물을 신격화한 것이므로 거부할 것을 주장하지만(GG., 178), 본래 “예수 경배”를 우회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결국 인간 예수에게 배워서 무한한 사랑의 신과 직접 교제하는 구도로 의식 체계를 제안했다. 바르트는 자기 가르침은 종교가 아니라고 강변할 것이다. 바르트의 가르침은 종교가 아니다. 신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경배하면 종교가 된다. 기독교는 예수를 경배하는, 믿는 종교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제시하는 교회는 예수의 헌신에 의해서 “자유롭게 신(神)과 교제하는 의식”이 무한하게 발생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바르트에게 종교는 없을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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