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7-06-13 19:5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주 여호와에서 예수까지

성경의 언어 <93>


위 제목의 핵심에서 확대한 것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주 여호와라고 불렀고 또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나 예수(16절)를 주 예수로 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에서 위 제목의 의미는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이다. 제목은 주제를 핵심적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성경 전체의 주제에서 핵심어인 여호와를 예수까지 연결시킨 것이다. 이런 연습이나 훈련은 성경의 부분을 묶거나 연결하는데 유용할 것이다. 마치 물건을 묶거나 엮을 때, 두 손을 잘 사용하는 것과 같다. 성경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되어 있는 것은 주제가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언약하시고 그 약속대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아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주 여호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어떤 과정으로 연결되고 진행되는지를 아주 간략하게 짚어 보고자 한다.

 1)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세 가지(창1:28)를 언약하셨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고 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기록되어(창2:4) 있다. 창세기 2장에서 3장까지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여호와가 반드시 붙어 있다. 이렇게 창세기 2장부터 계시적으로(show) 하나님을 여호와로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런 여호와 하나님은 구약성경의 끝부분인 학개와 스가랴와 말라기에서 만군의 여호와로 강조되고 있다. 위 제목의 주 여호와는 아브라함이 최초로(창15장) 부른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고찰하거나 연구적인 자세로 본다면, 여호와가 나오는 부분의 내용들은 모두 아담에게 언약한 세 가지와 연결되거나 연계되고 있다. 그 후에 구약성경에서는 주 여호와가 에스겔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시편과 예레미야서에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구약성경의 주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까지 그 의미 속에 결코 누락될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한편, 에스더에는 하나님과 여호와는 단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러하기 때문에 모르드개와 에스더와 유대인들에게 이루어진 일이 우연인가? 이 전체의 일들이 아담에게 또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배제되고 설명되거나 증명될 수 있나? 요셉이 팔려간 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번창을 위함이 아닌가? 여기 에스더서에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거나 만방에 흩어진 것은 보호되는 과정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보호나 섭리의 바탕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고 가능한 일이겠는가?         

 2) 주 예수 

대개 신약성경의 시작 문구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익숙하다. 이에 비해서 신구약 성경의 마지막에 나오는 “주 예수”에 대해서는 비중을 덜 두는 추세다. 이 주 예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에 각각 1회씩 나온다. 표현된 그 위치도 상당히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마태복음의 1장 1절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과의 연결을 꾀하여 마가복음으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나가고 있다. 앞의 에스더서처럼 구약성경에는 성령이나 예수가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문제도 에스더서처럼 표면적인 말이 없다고 해서 그 뜻이나 생명 그리고 의미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구약성경 전체가 메시아를 언약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태복음의 시작은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구약성경 전체를 싸잡아 메시아이신 예수에 접맥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경의 언약대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때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마태복음은 28장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놓았다. 이러한 논리적인 연결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 붙어있어야 된다는 것과도 연계될 것이다.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으로 연결되면서 구약성경의 주 여호와는 신약성경 끝의 주 예수로 나아가며 달려가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의도적으로 “주 하나님”을 10회(1:8~22:5) 정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 주(Lord)를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22:6)으로 풀이하였다. 그 누가 이 하나님의 앞의 위치에 여호와가 자리 잡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신약성경 마지막의 “주 예수”는 바로 앞의 “나 예수”라는 과정을 통하여 신구약 성경 전체를 하나로 집약한 주 여호와와 같지 않겠는가?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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