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3-01-11 19:5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십자가 위에서 큰 소리로 시편을 읊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7가지를 일반적으로 가상칠언이라고 부른다. 이 말씀들은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세라핌적 박사(The Seraphic Doctor)’ 보나벤투라(1221-1274)가 주석을 달았고 이후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에 의해 널리 알려져 중세 말기쯤부터 신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
가상칠언 중 4번째 말씀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말씀이 하나님께 어찌하여 버리셨냐는 예수님의 절규에 가까운 질문으로 “예수께서 절망했다”고 보거나, “하나님의 버림에 대한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외침”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예수가 극도로 힘든 순간에 기대했던 하나님의 개입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비평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예수는 한 번의 비명을 지르고 사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주장들은 사이비 종교나 이단 및 반기독교론자들이 예수님의 대속 실패설을 주장할 때 하는 말이다.
본문 말씀을 가지고 긍정적인 해석이나 설교 말씀을 펼쳐가는 경우를 보더라도 대부분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란 말씀에만 너무 집착하여 말씀을 풀어내기 때문에 억지로 풀거나 다른 좋은 말씀으로 슬쩍 포장해버려서 어딘지 모르게 말씀에 대한 목마름이 남아 있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시편 22편 전체와 연결해서 묵상해야 된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유대인 신학자이자 이스라엘 역사가였던 핀차스 라피드(1922-1997)가 1984년에 발간한 “그는 바다 위를 걷지 않았다”란 책자 중 소제목 “예수는 절망 속에서 죽었나?”에서 마태복음 27장 46절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의 의미에 맞는 올바른 번역은 “예수께서 시편 22편을 낭독했다”라고 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죽음으로부터 모면하기 위해 하나님께 요청한 것이 아니라, 가장 멀리 있는 암흑 속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새로운 하나님으로 접근함을 예감하고 있음을 시편 22편이 전체적으로 보여준다고 한다.

설교의 황제 찰스 스펄전(1834-1892)은 시편 22편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1-10절은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간구함, 11-21절은 임박한 환란을 당하여 하나님께 간구함, 22-31절은 구원에 대한 예측이다. 이 시에는 십자가의 어두움과 영광, 그리스도의 고난과 후에 따를 영광이 들어 있다고 본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질문을 하신 예수께서는 시편 22편 21절에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라고 환성을 지르시고 확실한 찬양가로 끝을 내신다(시 22:23-32). 한편 마태복음 27장 47절과 마가복음 15장 35절에는 군중들이 “엘리야를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엘리 엘리…”라고 말씀하셨고 마가복음에서는 “엘로이 엘로이”라고 말씀하셨다(개역개정에서는 모두 엘리 엘리로 번역함). 엘리나 엘로이의 외침을 엘리야로 혼동했다기보다는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시편 22편 10절의 말씀에서 “엘리 아타, 엘리 아타(주는 나의 하나님, 주는 나의 하나님)”라고 이스라엘의 습관처럼 두 번 반복해서 부를 때에 엘리야로 들릴 수 있다고 핀차스 라피드는 강조한다. 또한 “내가 목마르다”(요 19:28) 말씀은 시편 22편 15절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와 같다고 보며,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시편 22편의 마지막 절인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라는 말씀으로 본다.
『침묵』이란 소설로 유명한 엔도 슈사쿠(1923-1996)는 “예수의 생애”(1973)에서 예수께서 시편 22편 전체를 마친 다음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라”(시 31:5-8)라는 외침으로 옮겨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비록 엔도 슈사쿠가 어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세례를 받았고 그의 시체가 성당에 안치되었지만 그는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리스도교 양복을 입었다고 고백한 소설가였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왕대일 교수는 “시편사색, 시편 한 권으로 읽기(2013)”에서 엔도 슈사쿠의 묵상이 우리의 사색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면서 시편 22편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긍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기도라고 소개한다.
“설교와 예배를 위한 시편”에서 로저 반 하른(1933-2019) 목사와 공저자인 브랜트 스트라운 교수는 “시 22편 24절이 예수께서 시 22편을 전체적으로 혹은 처음 몇 구절만 십자가에서 인용했을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다”라고 말한다. 24절의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라는 말씀이 2절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는 말씀과 이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듣고만 계셨다고 본 것이다. 성경 및 교부학자인 존 메이슨 닐(John Mason Neal, 1818-1866)은 그의 “초기 및 중세 작가들의 시편 주석”(1868)에서 당시에 소홀히 한 성경의 “신비한 해석”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서 ‘신비적’이란 말은 철저하게 기독론적이란 의미라고 풀이한다. 이 책에서 닐은 예수께서 시편 22편 1절에서 시작하여 시편 31편 5절에 이르렀을 때 운명하셨다는 전통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내용은 스펄전의 “시편 강해”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찰스 스펄전은 시편 22편의 각 절마다 예수께서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를 상상의 날개를 펴가며 해설하고 있다. 3절 말씀(주는 거룩하시니)을 주님은 “아버지여, 당신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아! 왜 당신은 당신의 거룩한 자를 이처럼 극한 고통 가운데 버리신다는 말씀입니까?”라고 기도하신다고 하고, 6절 말씀(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은 “자신을 사람보다 더 낮추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11절(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기를 기도하신 것”이라고 하고, 16절(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에서는 주께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22-31절 말씀(구원에 대한 예측과 찬양)은 주께서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그분이 십자가에서 마음속으로 하신 독백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은 시편 22편이 원래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 끝난다고 하여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마지막 4, 5, 6, 7번째 말씀이 모두 시편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어떤 모임이 끝나고 나오면서 한 사람이 “오늘 우리는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오랜만에 큰 소리로 불렀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이 애국가 1절을 다 불렀다고 이해할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4절 끝까지도 불렀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시편 22편 1절만을 읊으신 것이 아니라 시편 22편 전체를 읊으셨고 또 계속해서 시편 31편 5절까지 계속 읊으셨다고 봐야 한다. 누가복음 23장 46절에 예수께서 마지막 말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실 때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고 쓰여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실 때 큰 소리로 시편 22편을 읊으시기 시작하여 시편 31편 5절까지를 힘차게 읊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여인갑 장로 (지구촌교회 / (주) 시스코프 대표이사·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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