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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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0-29 19:2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 기록 목적으로서 ‘여호와 계시’ I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위의 본문은 성경 해석상 논란을 야기하는 부분이다. 문제는 ‘부분적인 것’과 ‘온전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내세(來世) 천국 상황을 말하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맥락상 천국 상황보다는 성경계시 기록의 완성 시기라는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결론부터 내리면 필자는 후자가 더 분명한 주장이라고 본다.
여러 가지 은사를 말하는 고린도전서 13장과 14장의 상황은 그야말로 신약계시 완성이 되지 않은 상황이며 동시에 신약계시 완성이 진행되고 있는 계시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고 본다.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낸 보혜사 성령께서 임한 확실한 증거는 주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도들을 중심으로 드러났다. 베드로 사도의 ‘성경강론’을 동시통역 방식으로 듣게 되는 표적으로부터 시작해서 옥문(獄門)이 열려 사도들이 풀려나거나 사도들에 의해 불치병이 낫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그리고 사마리아와 이방국가 로마로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복음이 점점 확산되면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예루살렘 교회에 임하여 사역하신 방식과는 점점 다르게 바울과 같은 사도와 그의 동역자들을 불러서 구약성경을 풀어서 강론하는 즉 성경강론(행 17:2; 18:4; 19:8, 9; 20:7, 9; 24:25; 28:23)하는 일에 전념케 하신다. 앞서 인용한 사도행전 본문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사도행전 후반부에 기록된 전도 대상 지역 즉 이방 전도에 매진하게 할 때 보혜사 성령께서는 사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 국가를 가르치되, 구약 성경을 풀어서 가르치는 ‘성경강론’ 중심으로 사역하게 하신다. 이는 바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임하셔서 수십 년이 흐르면서 점점 신약계시 기록 완성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앞의 고린도전서 13장 10절 본문은 사도 바울이 아가야 반도 곧 고린도 지역에 18개월 동안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 전파에 매진할 때 그리고 사도들이 떠난 후에 생긴 문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직접 계시를 받은 은사 문제’가 가장 컸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교회의 최고 은사로서 ‘사랑’을 강조하게 하신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각종 은사들이 분명히 있음을 소개하고 방언보다 예언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하신다. 이는 바로 보혜사 성령께서 성경을 풀어서 가르칠 수 있는 은사 즉 ‘구약성경을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의 증거’로 풀어서 가르치는 ‘성경강론’과 그렇게 가르치게 하신 것을 기록하게 하는 일 곧 ‘신약계시를 완성하는 일’과 직결된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도들에게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사도들이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분명함을 확증해 주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드러내셨던 표적과 기사는 점점 줄어들고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일부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른 바울 사도를 통해 점점 신약계시를 완성해 가도록 하신다. 그 와중에 계시 내용과 직접 관련된 ‘방언’이나 ‘예언’ 그리고 ‘각종 지식’은 부분적인 것으로 신약계시 기록이 완성되면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하게 하신 것이 바로 앞의 본문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대부분의 개혁파 교회의 주석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입장 즉 ‘죽음 이후에 내세에 가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는 해석을 반복해 왔다. 칼빈에게 온전한 것은 ‘죽음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며 죽음으로써 인간의 유한한 것들이 끝나고 그것도 최후 심판 때 가야만 드러난다. 이러한 해석은 앞서 설명한 보혜사 성령의 전체적 사역과 고린도전서의 전체 맥락에 비추어 볼 때 고린도전서를 관통하여 단일한 주제를 파악하는 데 적절한 해석이 아니라고 본다. 칼빈의 이러한 해석을 박윤선의 주석에서도 반복한다. 박윤선은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내세가 완전히 나타나는 때’” 즉 심판의 때라는 칼빈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서구와 한국의 개혁파 성경 주석의 ‘종주(宗主)’라고 불리는 칼빈과 박윤선의 이러한 해석은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하에서는 앞서 설명한 고린도전서 13장 10절의 ‘온전한 것’을 ‘신약성경 계시기록의 완성’을 주장하는 강론자의 주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언약성취섭리사’의 관점에서 각 권 550쪽 분량으로 ‘성경신학총서’ 20권을 28년에 걸쳐 완간한 박용기 목사의 ‘성경강론전집’(진리의말씀사)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온전한 것”은 부분적으로 하던 것에 대한 대칭으로서 예언한 말씀을 온전히 알도록 기록될 신약성경을 의미한다. 바울이 본서를 기록할 당시는 신약성경계시가 진행되고 있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복음진리를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온전한 신약성경계시가 완성되면 당연히 부분적으로 알거나 예언한 것들은 무익해진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다. 바울은 은사에 있어서 방언이나 예언 또는 부분적으로 아는 지식이 무익해진다는 것에 대해 바울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곧 바울 자신이 장성한 사람이 된 후에는 어렸을 때 하던 말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을 버리게 된 것처럼 은사에 있어서도 복음진리가 온전히 계시될 때에는 방언이나 예언이나 부분적으로 아는 지식은 무익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박용기 저, 『성경강론 16』, 성남: 진리의말씀사, 2012, 8421.)

이러한 박용기 목사의 ‘언약성취섭리사’의 관점에 의한 성경주석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내용을 모두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연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위의 해석은 적어도 고린도전·후서의 전체 내용을 고려하여 주석한 내용이다. 박용기 목사는 성경 기록 목적을 ‘여호와 계시’로 간단하게 정리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다루면서 서구 개혁파 신학이 미진했던 것을 성경의 논리적 통일성에 근거하여 어떻게 보완하고 해명해 가고 있는지 소개할 것이다.


<183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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