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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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1-31 21:4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상처투성이 발바닥과 ‘엄살’ 휠체어


요사이 방송사 뉴스에서 그리고 SNS에서 한 장의 사진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어떤 테니스 선수의 ‘상처투성이 발바닥’이다. 주로 서양인들이 독주하는 테니스계에서 그곳도 그랜드 슬램(grand slam)에서 58위에 있는 동양인이 4강 신화를 이룩한 발바닥이기 때문이다. 그랜드 슬램을 목전에 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까지 자극하면서 한국 사회는 몇 일간 매우 흥분했다. 월드컵 축구 4강 신화로 온 나라가 들썩였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같은 시간 시청률 5%를 넘는 기염(氣焰)을 토하기도 했던 순간이었다.
사실 운동선수들의 발에 대해 의지와 투지를 발산한 인간 승리의 표본들로 많은 사례들이 회자(膾炙)된다. 하지만 금번 20살 갓 넘은 청년의 표정에서는 무서울 만큼 느껴지는 침착함이 다시 놀라게 했다. 그 나이에 보여야 할 표정은 ‘비장함’이 더 어울리건만 그는 눈물도 짓지 않고 담담함으로 자기 처지를 받아들였다. 승부욕에 대한 단순 좌절이 아닌 ‘즐거운 놀이’ 중에 잠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발바닥이고 담담한 표정이길 바란다.
온갖 비리와 뇌물로 국가적 범죄를 저지른 통치자와 거물급 정치인들 그리고 정경유착의 장본인들인 대기업 총수들이 타고 다니는 ‘엄살’ 휠체어와 ‘거짓’ 의료침대에 대한 경고로도 보인다. 타야 할 사람은 타지 않고 절대 타지 말아야 할 사람이 타고 나타나는 화면들을 상처 난 발바닥이 잠시라도 모두 덮어버린 셈이다.
상처에 담긴 의미는 무수하다.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 중에 무의미한 것은 없다. 자신이 자초했건 타인이 손상을 입혔건 뼈아픈 상처는 몸속 깊숙이 늘 박혀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안고 있는 상처에 대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다른 고민을 하나 더 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그 상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무엇으로 성폭행 피해자의 눈물을 닦을까
배신인가? 정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