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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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9-26 20:4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송 장로님께


“목회는 직업이 아니고 목숨을 담보한 사명이라는 사실…”

장로님! 어느 언덕에 잠들어 계신지! 침소는 아늑한지요? 빈소도 찾아가지 못했어요. 잠드시고 얼마 지나서 세상을 떠나신 소식을 접했거든요. 세상을 좀 살다 보니 인간이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헤어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고요. 특히 장로님과 저와의 만남은 좋았는데, 헤어짐은 매우 불미스러웠거든요. 그래도 잠드신 것을 알았으면 빈소를 찾아 영정 앞에서 편히 쉬시라는 인사라도 드렸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워요. 장로님과 일생을 같이하신 권사님은 아직 생존해 계시고요. 더러 소식은 듣고 있어요. 장로님은 훌륭한 법조계 사위 덕에 말년을 매우 바쁘게 사셨잖아요. 사위 배경을 업고 각종 소송 문제에 대한 해결사 노릇을 하시면서요. 육군 장교 출신으로 사교성도 남달리 뛰어나셨고요.

장로님은 부인 권사님의 권고로 적을 저의 교회로 옮기신 후, 교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질 정도로 영향력이 컸거든요. 성경 공부에만 열중하던 성도들이 놀기를 좋아하고 여행을 즐기게 되었지요. 다른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장로님의 사교성에 정신을 잃을 정도였잖아요. 이단에 대한 상소 건이 총회에서 승소로 끝나자, 그로 인해 장로님은 노회 목사님들을 알게 되었죠. 노회 목사님들은 장로님을 탐내면서 나에게 “어떻게 저런 대어(大漁)를 낚았느냐?”라고 묻기도 했으니까요. 장로님이 시무장로가 된 후, 한때는 장로님에 의해 노회와 교회 관계가 매우 좋았거든요. 교회도 날로 성장해가고요. 2백여 평에 달하는 공간이 비좁을 정도였으니까요. 장로님들을 비롯해 성도들의 교회당 건축에 대한 염원이 한참 무르익어가기도 했지요.

갑자기 어느 장성 출신이 공원 예정지를 풀어 조성하는 아파트단지에 종교 부지 5백여 평이 나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죠. 장로님이 자세히 알아보시고 반절은 장로님들 몇 분이 합자해서 매입하기로 하고, 반절은 교회 앞으로 매매계약을 하셨지요. 교회가 돈이 없으니까 반절만 하기로 했다는 거였어요. 그때까지도 저는 목회비 없이 자비량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있었을 때였으니까요. 사실 모든 교회 경제권을 장로님들에게 맡기고 저는 성경만 연구해서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하며 살았잖아요. 제가 교회를 개척했다 해서 교회에 생활비를 요구할 수는 없거든요. 예수께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명하신 말씀대로 살려고 했죠. 그리고 목회는 직업이 아니고 목숨을 담보한 사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1989년 9월, 매입한 토지 부근으로 집회 장소를 옮긴 후였죠.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분위기가 조금씩 변해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장로님의 노회 출입이 잦아지면서 장로님을 중심으로 칠팔 분의 장로님들이 단단히 결속하는 모습이 보였거든요. 목회 경험이 없는 저로서는 장로님들의 결속이 매우 좋게만 보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장로님이 다른 장로님 두 분과 함께 저를 찾아오셨잖아요. 저와 상의할 일이 있으시다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특히 저와 교회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어요. 목사님이 그동안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생활비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도 하셨고요. 앞으로는 강사료를 지급해드리면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물으셨지요. 강의 시간당 강사료를 책정해서 주겠다는 거였어요. 저는 단호히 거절했죠. 내가 성경을 연구해서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사명이기 때문에 흥정이나 계약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죠.

그 후부터 교회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기 시작하더군요. 노회와 결탁해서 저를 교회에서 내보내고 다른 목회자를 모시자는 여론이 돌기 시작했지요. 저는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장로님들이 건축비를 마련해 교회당을 지어야 한다는 노회의 이간질에 대부분의 장로님이 동조하게 된 거죠. 그래서 다시 이단 시비를 거는 거였어요. 강대상에 구두를 신고 올라가 손을 들지 않고 축도할 뿐 아니라,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으므로 이단이라는 거죠. 어느 날 노회 목사님이 찾아와 매입한 땅만 놓아두고 따르는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면 목사직을 제명하지 않고 살려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불법행위에 제가 승복할 수 있겠어요. 생애 처음으로 경찰에 불려가 조서도 받았죠. 경찰이 “가짜 목사들이 진짜 목사를 죽이려 하는구먼!” 하고 혼잣말을 하더라고요. 저보고 염려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으니까요.

결국, 장로님이 취하하자고 했잖아요. 법조계에 있는 사위의 힘도 어쩔 수 없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었죠. 매입한 토지는 반반으로 나누기로 하고 고발 건은 취소했으나 그 땅마저도 소송경비로 다 없어지고 말았죠. 당시는 정말 장로님이 너무너무 싫고 미웠어요. 지금은 도리어 불쌍하고 가련하게 느끼고 있거든요. 왜 그런지 모르시죠. 하나님께서는 더 좋게 해주셨거든요. 장로님과 헤어지고 10년 후에 교회당을 1천여 평 대지 위에 연건평 8백여 평을 신축하고, 2000년 1월 1일에 입당했지요. 또 10년 후에 1천여 평을 더 매입해 연건평 5백여 평의 노인복지 시설을 신축하여 수고하신 어른들이 생활하고 있거든요. 아마 장로님이 계셨으면 불가능한 일이죠. 왜 그런지 알려 드릴까요.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강조했을 것이니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열정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성령의 감동에 의한 성도들의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거든요. 장로님은 가난한 저를 측은히 여겨 시간당 강사료를 주겠다고 했으나 급조된 예배위원회에서 목회만 전념하도록 생활비와 자녀교육비 및 사택 경비와 자가용 등을 일절 책임지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다 흩어지고 50∼60여 명 남은 성도들이 모두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게 된 거예요. 건축하기 위해 그 흔한 ‘부흥회’도 한번 한 바가 없거든요. 모든 성도가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된 거예요. 언젠가 장로님과 생을 함께하신 권사님이 다시 등록하시려고 찾아오셨더라고요. 영적으로 배가 고파 다시 오셨다고 하셨어요. 장로님은 몸이 불편해서 못 오셨다고 하셨고요. 불쾌하게 생각하신 어느 권사님이 호통쳐서 돌려보내는 것을 보았어요. 안타깝기는 했어도 어쩔 수 없잖아요. 많은 성도가 권사님을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으니까요. 장로님! 많이 후회하셨지요. 지난 일은 모두 잊으시고 부디 편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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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서기 목사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