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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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11-09 20:2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부모님께

“아버지는 자원하여 자비량하는 사찰 겸 목회자였던 셈이죠.”


어머니 아버지! 며칠 전 고향마을 뒷산에 아늑히 자리한 산소에 다녀왔어요. 십여 명의 후손들 3대가 산소 앞에 함께 둘러앉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어요. ‘하나님 아버지! 택함을 받은 선조들의 자손으로 세상에 태어나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요. 그리고 산소 앞에 둘러앉은 후손들에게 선조의 묘들을 차례로 소개해 주기도 했어요. 아버지께 들어서 알고 있는 선조들에 대한 약사도 전해주고, 저를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약사도 전해주었어요. 철이 좀 들어서인지 산소에 다녀온 후 부모님에 대한 많은 생각이 머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갑자기 지상으로 공개서한을 드리려고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는 이유랍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이 개척하신 고향 교회당을 둘러보았어요. 부모님 생존 당시의 과거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이 현대식 건물로 개조되었더군요. 대지도 더 넓어졌고요. 시설도 더 다양하게 많아지기도 했고요. 그런데 인적을 찾아볼 수 없이 적막한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왔어요. 근동에 있는 마을들에는 인구가 점점 많이 줄어들고 있어 70세를 넘긴 노인이 제일 젊다는 말을 들었어요. 주일에는 노인들 몇 분이 교회당 자리를 지킨다는 거였어요. 고향교회의 적막한 상황이 부모님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도록 뇌리를 강하게 자극하더라고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엿새 동안 쉴 틈 없이 일하시던 아버지, 주일 아침에는 물론 매일 새벽마다 앞마당 모서리에 세워진 종각 아래서 기도하며 줄을 당겨 종을 울리시던 아버지, 주일 공과 시간에는 교인들에게 칠판 앞에 서서 공과를 가르치시던 아버지, 그리고 새벽마다 교회 마룻바닥에 엎드려 세계만방에 복음이 전파되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시던 어머니……. 어찌 잊혀질 수가 있겠어요.

어린 시절 어머니 아버지의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매일 저녁 가족들이 모이면 아버지는 “어지러운 세상 중에 기쁜 소리 들리네. 예수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여 따르라.”라는 찬송을 자주 불렀잖아요. 이어서 “세상 헛된 신과 영화 모두 내어 버렸네.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날 더 귀히 여겨라. 기쁜 때나 슬픈 때나 바쁜 때나 틈날 때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날 더 귀히 여겨라. 주여 크신 은혜로써 부름 듣게 하시고 복종하는 맘을 주사 따라가게 하소서.”라고 부르실 때는 촉촉이 젖어오는 눈시울을 지그시 감으셨지요. 지금은 좀 철이 들고 보니 그때 아버지의 간절한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서 생각만 해도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져요.

지금도 세상이 너무 어지럽거든요. 타락으로 저주가 덮인 세상이기에 어쩔 수 없잖아요. 해방된 지 70여 년이 훌쩍 넘었는데 일본과의 갈등은 지금도 여전해요. 동족상쟁은 휴전상태지만 아직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공포탄을 수없이 퍼부어대고 있거든요. 그뿐 아니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려고 전쟁 중이고, 중국은 대만을 정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극한 갈등을 겪고 있어요. 거기에 코로나 전염병까지 3년째 전 세계를 뒤덮어 엄청난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폭동과 살상도 곳곳에서 쉴 틈 없이 일어나고 있고요. 세계 경제는 급격히 추락하고 있어요. 정말 혼탁하고 어지러운 지옥 같은 세상이에요. 이에 아버지께서 자주 부르시던 찬송이 제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는 거예요.

왜정 말엽에는 일본 관료들이 교회당을 찬탈해 자기들 면사무소로 사용했지요. 목회자가 없는데도 주일마다 성도들은 사택 청마루에 모일 수밖에 없었고요. 청마루 한쪽에 놓인 탁자 앞에서 성도에게 말씀을 전하시던 아버지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총을 어깨에 멘 일본 형사가 뒤에 서서 일본을 규탄하는 언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며 집회를 빨리 끝내라고 호통치기도 했잖아요. 전쟁을 위한 참호 공사에 성도를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아버지는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시고 담담하게 말씀을 전파하셨고요. 성경학교나 신학교도 다니지 않으신 아버지는 전도사나 목사로 안수도 받은 바 없이 말씀을 전하셨지요. 아버지는 자원하여 자비량하는 사찰 겸 목회자였던 셈이죠. 어머니께서 손수 마련해주신 하얀 무명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힘주어 말씀을 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거예요.

늦가을 어느 날 갑자기 일본 형사가 긴 창이 꽂힌 장총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들이닥쳤잖아요. 아버지께서 깜짝 놀라시는 표정을 옆에서 보고 있는 저는 너무너무 무서웠거든요. 일본 형사는 집 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지요. 한참을 뒤지다가 부엌으로 들어가 땔감을 쌓아둔 나무 무더기를 창으로 내려찍기 시작하자 ‘쿵 쿵’ 소리가 났지요. 형사는 고개를 숙이고 떨고 계신 아버지를 향해 일본말로 “바가야로”라고 소리쳤지요. 일본 형사의 명에 따라 아버지가 땔감을 다 옮기고 쌓인 흙을 헤치자 곡식이 가득히 담긴 큰 항아리들이 보이기 시작했고요. 아버지께서 가을에 거둔 곡식을 일본군의 군량미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깊이 감춰둔 거였어요. 곡식 한 톨 남김없이 모두 탈취당하고 말았지요. 이제는 온 가족이 굶어 죽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왜 절망하거나 주저앉아 통곡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무서워 울며 도망쳤거든요. 지금은 그 이유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본 형사는 매몰차게 곡식을 전부 탈취해 가고 곰팡이가 시퍼렇게 낀 기름 짠 콩 찌기를 대체 식량으로 나누어주었지요. 어머니는 콩 찌기를 3, 4일씩 물에 담가 시퍼런 곰팡이를 제거하고 앞뜰에서 채취한 나물을 섞어 죽으로 만들어 가족들로 먹게 했잖아요. 온 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으면 아버지께서는 대표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어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요. 그때는 아버지의 기도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어요. 저는 솔직히 감사보다 짜증이 앞섰거든요. 돌이켜 보면 아버지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도 바울도 주리고 목마르게 하셨더라고요. 아버지! 철없던 시절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아버지! 오늘은 이만 줄이고 다음 기회에 또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어지러운 세상일은 모두 잊으시고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평안히 쉬세요.

2022년, 철이 없던 넷째 아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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