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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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9-18 15:2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도로서의 삶

- 은사 따라 살면서 복음에 합력하는 삶 -


삯을 받고 일하는 자들을 우리는 삯꾼이라고 부른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삯꾼이 아니고 사명을 받은 자들이기에, 성도들이 감사함에 사례하는 사례비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마저도 고정급인 생활비 성격이 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언제부터인가 삯을 받고 일하는 직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목회자를 청빙하는 데 있어서도 월급을 책정하여 청빙하고 있으며, 책정된 월급을 보고 청빙에 응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목회자에 대한 사례는 그 액수를 책정할 수 없다고 본다.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적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삶은 다른 직업인의 삶과 다르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삶과 다른 직업의 차이는 백 가지 직업이 서로 다르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차이가 아니라 목회직과 다른 아흔아홉 가지 직업이 다르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범주적’ 차이이다.

 이 차이는 교사와 다른 직업인들이 받는 봉급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다른 직업인들이 받는 봉급은 노동의 대가이다. 노동에는 ‘노동시장’의 원리에 따라 각각의 양과 질에 상응하는 값어치가 결정되어 있다. 이것이 ‘임금’이다. 임금은 이런저런 결과를 가져다 주면 이런저런 정도의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생각에서 주는 돈이며, 그런 뜻에서 임금은 그것이 실지로 지불되는 시점과 관계없이 성격상 ‘사후 보상’이다.

  그러나 교사가 받는 봉급은 ‘임금’이 아닌 ‘사례’이다. 교사가 하는 일은 그 값어치를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례는 아무리 많아도 결코 너무 많지 않으며, 또 극단적으로 말하면 전혀 없어도 무방하다. 다른 직업인들의 봉급이 노동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사후 보상’이라면 교사의 봉급은 그가 해야 할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 달라는 뜻에서 주어지는 ‘사전 보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사의 봉급이 지불되는 시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교육과정 및 평가, 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이홍우.유한구.장성모 공저, 2005, p.154-155.).

  즉 다른 직업은 일한 삯으로 임금을 받으며, 교사는 그가 해야 할 일을 앞으로도 계속해 달라는 뜻에서 주는 사례비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직업의 임금은 후불제이며, 교사의 봉급은 선불제이다. 일의 성격으로 볼 때에 교회 목사(牧師)의 경우도 교직에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와 목사는 삯꾼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교사와 목사를 삯꾼 부리듯이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현재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일반 교사들은 책정된 봉급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목회자들 역시 그러한 추세이다. 오히려 목사들은 교회의 재정 형편에 따라 기업의 오너들같이 성과급 성격의 봉급을 받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은퇴 후에는 평생 연금을 받기도 한다.

  목회자도 생활인이기 때문에 목회에 전념하게 하도록 성도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주는 사례비는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할 수만 있으면, 생활인으로서 생활을 유지 할수 있도록 생활비 수준의 사례를 한다면 더욱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한 목회자의 노후를 교회에서 보살펴 주는 것 또한 아름다운일일 것이다. 문제는 순수성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이제부터라도 목회자들 스스로가 앞장서서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했으면 한다. 직업으로 여기며 삯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으면 한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신 목회자들을 직장의 직원 부리듯이 하지 말고, 물질로 희롱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목사와 성도로 구분하는 자체가 이분법적 사고이다.

  우리 모두는 성도로서 은사가 다를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복음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가 순수성을 지켜나갔으면 한다. 오직 복음을 위해 합력하는 동역자들로 살아갔으면 한다. 세상과 교회를 이원화시켜 놓고, 목회자와 성도로 이원화된 그런 교회 안에서 서로 대립하며 살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이 아니라, 범사를 은사 따라 일하며 복음을 위해 합력하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여 합력한 것같이, 아가야 성도, 마게도니야 성도들이 복음을 위해서 합력했던 것같이 그리고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을 위해서 합력했던 것같이 우리는 오로지 복음을 위해서 서로 합력하고 사는 성도들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와 세상을 이원화시켜 놓고 세상에 나가서는 육적으로 살고, 교회 안에서는 위선적으로 사는 그런 삶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은사 따라 살면서 복음에 합력하는 성도들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러한 삶을 살게 하시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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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와 성경신학적 세계관
성도의 영적 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