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01-09 22:2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역사비평학(성서고등비평학) 비판


1. 성경은 경전(經典)인가?

객원기자  오늘은 우선 성경에 대한 용어상의 규정에 대해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작하고자 합니다. 역사비평학자들은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經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종교인도 대부분 성경은 다른 종교의 경전처럼 성경도 하나의 경전일 뿐이라고 규정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하거나 고백하는 많은 성도들도 경전이라고 말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성경은 경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 기록의 절대적 진리의 말씀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경전이라는 말이 마치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저는 이 말의 사용을 부정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경전이라는 용어는 타 종교에 대해서도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보혜사 성령께서 진리의 영으로 감동하여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타종교의 인본주의적 기록과 상대화하는 것을 저는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S연구생  네에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주장만 강하게 한다고 저절로 ‘성경은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명제가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볼 때 성경이 경전이 아닌 결정적 근거는 일관된 논리에 의한 진리임을 증명하면서 전체적인 단일 주제를 제시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기록 기간으로 보더라도 모세부터 사도 요한까지 1600여 년 동안 기록된 내용의 전체 주제를 하나로 묶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전 이쯤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의미 중심으로 논리적 일관성을 확증하고 전체 주제인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므로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증명한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은 너무도 통쾌하면서도 역사비평학에 대한 강력한 응징 무기가 된다고 확신합니다.

박용기 원로  저와 관련된 것이라 조금은 부끄럽기는 하지만 역사비평학에 대한 비판을 하는 상황을 고려해서 더 말씀드리면, 제가 정리한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떤 구절 하나 어떤 사건 하나 타종교의 경전과 타협할 수 있는 인간적인 기록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성경의 논리적 통일성과 구조적 완벽성을 통한 절대진리의 확증은 역사비평학 혹은 문서설의 도전에 대해 이곳 한국에서 종지부를 찍어야 하며 찍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첨가하면 성경이 타종교와 비등한 관계의 경전이 아닌 이유는, 타종교의 모든 문서들은 목적이 인본주의 또는 인간중심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위한 신적 계시의 산물입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인간중심의 산물인 경전과 섞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경전이 아닙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해주는 정확무오한 신적 계시의 기록입니다.

2. 율법에 대해 예수님은 율법 준수를, 바울은 율법 폐기를 주장했는가?

J연구생  역사비평학자들은 복음서와 바울서신이 다르다고 말하면서 논리적 모순을 지적합니다. 가령 마태복음 5장 17~20절에서 예수는 율법을 완성하려고 왔으며(7절) 그래서 예수가 와서 말한 것은 율법사와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 지켜야 한다(20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경우에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해 성경은 서로 모순된다고 지적합니다.
저는 이러한 주장을 보면서 주장 자체가 악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 전체를 보면 예수님의 의도는 율법에 대해 재해석을 하시면서 자신이 구약의 메시야로 오신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메시야 삼직(三職) 중 선지자의 직임을 수행하시는 내용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만약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왜 십자가에서 제물되시는 임무를 수행하셨겠습니까! 이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완전히 성취하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P연구생  맞습니다. 제 생각에는 역사비평학의 주장은 처음부터 복음서를 인간 문서로 전제하고 접근하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 얘기한 부분이 마태복음 5장 이해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마태복음의 신적 권위는 마태복음이 메시야의 삼직 즉 선지직, 왕직 그리고 제사직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한 부분은 말씀을 선지자의 글을 통해 자신을 메시야로 증거하는 내용으로서 계명과 율례를 가르치는 권능을 통해 자신이 선지자의 직임을 완성하는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마태복음 5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께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야로 오셨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삼아 사도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확증으로 성도가 받은 복음은 절대적이며 은혜임을 확증하고 있다고 봅니다. 

3. 로마제국에 대해 성경은 다르게 말하는가?

객원기자  역사비평학자들은 로마서 13장 1절과 4절에서는 바울이 로마제국을 선한 세력으로 소개하지만,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로마가 심판받아 멸망당할 세력으로 등장하므로(계 17:18) 서로 모순된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에 대한 성경신학적 비판을 가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용기 원로  좀 전에 말씀하신 대로 역사비평학자들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고 성경을 처음부터 인간 문서로 접근한다는 지적에 정말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부분의 차이를 발견하여 단지 성경의 모순폭로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각 권에서 성령께서 의도하신 바가 다르며 그 기록 목적도 부분적으로는 다릅니다. 로마서 13장은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해 파멸당합니다. 그리고 132~135년에 예루살렘성이 멸망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멸망은 예수께서 이미 언약한 사실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예루살렘의 철저한 멸망을 다름 아닌 로마제국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예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성취하는 도구로 사용한다고 해서 로마제국 자체가 ‘선한 제국’인 것과는 전혀 별개입니다. 로마서 13장 1절에 나타나 있듯이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제국을 사용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는데 누가 간섭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인간의 상식과 판단, 정서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경우를 보면 로마서 13장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로마제국을 하나님의 도구이므로 사용하신 후 작정하신 대로 멸망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있으며 선하게 쓰는지 악하게 쓰는지 모든 주권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속합니다. 세상의 악과 선에 대한 판단 기준은 오직 절대가치의 재판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4.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은 각각 임의적 해석에 불과한가?

K연구생  역사비평학자들의 성경해석 시도는 제가 볼 때 인간중심적 선과 악 판단을 전제로 합니다. 이른바 ‘잔인한 역사 섭리’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배제하고자 합니다. 일종의 딜레마입니다. 왜냐하면, 잔인한 역사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배제하면 ‘악한 신’과 ‘선한 신’의 대립으로 향하는 이원론이 되고, 그렇다고 일원론으로 정리하려면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일에 어떻게 하나님이 개입할 수 있느냐가 의심되기 때문이다.
역사비평학자들은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서 처절하게 아버지께 울부짖는(막 15:34) 자로 버려지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자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로 규정하면서 성경은 논리적 연결성은 고사하고 각자 인간 기록자들이 자기 좋을 대로 기록했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목적을 두고 기록하게 하셨다고 확신합니다. 박용기 원로연구원의 ‘성경신학총서’(20권)의 서론 『의미분석 성경개론』을 인용해서 말하겠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이 어떠한지 증명하도록 기록한 내용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버려지는 상황은 자신이 힘과 권세가 없어서 무기력하게 당하는 것처럼 기록되었지만 그 의미는 그렇지 않습니다. 처절하게 버려지시는 과정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께서 이미 창세전에 정해놓으신 ‘구속주의 신분’을 확증하는 과정입니다. 버림당하여 치욕을 받으시는 과정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유일한 인자(人子)로서 예수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유일한 ‘구속주’가 되신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반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의연하게 죽으시면서 큰 고통을 하소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누가복음은 그 자체 기록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원로 연구원님의 저서를 인용하면, 누가복음은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의 ‘사역’의 위대함을 증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권세에 맞서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 상에서도 ‘사역’을 하시는데 바로 강도 중 하나를 낙원에 보내는 ‘사역’을 하십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육신을 입었지만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밖에 이러한 ‘사역’을 감당할 존재가 없습니다.   

5.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이 과연 다른가?

객원기자  역사비평학자들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날에 대해 복음서의 주장들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인간 저자에 의한 인간 문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부분을 좀 더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가복음 15장 25절에 보면 예수님은 유월절 제삼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 14절에 보면 예수님은 ‘유월절의 예비일 제육시’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일한 사건에 대해 복음서는 서로 모순되므로 복음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박홍기 연구원  얼핏 보면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5장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새벽부터(1절, 금요일이며 안식일 전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판결 후 예수님은 온갖 희롱을 당한 후 십자가에 못 박히시려 끌려가십니다.(20절)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며(21절) 예수님은 골고다에 도착하십니다.(22절) 그 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며(23절) 그때가 제삼시(현재 오전 9시)였습니다.(24절)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다시 희롱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제육시(현재 정오 12시)가 되어서는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됩니다.(33절) 그리고 예수님은 제구시(현재 오후 3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며(34절) 운명하십니다.(37절) 그리고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금요일)이었습니다.(42절)
먼저 요한복음 19장의 기록을 따라가 봅시다. 14절에 보면 ‘유월절의 예비일 제육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빌라도가 제육시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유대인들에게 넘겨줍니다. 17절에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옵니다. 18절에는 그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습니다. 그래서 못 박은 시간은 적어도 제육시 이후가 됩니다. 그리고 30절에는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31절에 의하면 이 날은 ‘안식일 예비일’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시체를 치워달라고 한다. 42절에 보면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안식일 전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 돌아가셨습니다. 토요일 전날이 되므로 금요일에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9장 14절의 ‘유월절의 예비일’은 목요일 밤부터 시작하는 ‘무교절 절기 전체의 첫날이며 곧 유월절 양 잡는 날’(막 14:12)이며 이날은 안식일 전날 ‘금요일’이 됩니다. 그래서 14절의 ‘유월절의 예비일’은 유월절 절기가 시작하는 날 즉 무교절 축제가 시작하는 날(죽으신 다음 날, 안식일)의 전날이다. 그래서 유월절 예비일은 금요일이며 마가복음에 기록한 예수님의 죽으신 날과 같은 날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시간은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시간 이해는 전통적으로 전제가 필요합니다. 공관복음의 시간이 유대인이 사용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시간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유사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주후 90년 이후) 이미 유대와 예루살렘은 망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수신자는 로마제국으로 포로가 되어 모두 흩어진 유대인과 이방인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공관복음과 유독 ‘세상’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복음의 시간은 당시 현재와 비슷한 로마제국의 시간 규정을 따른다고 보는 것이 여러모로 합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9장 16절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시간은 제육시(현재 오전 6시)이며, 18절에 보면 제육시 이후 골고다까지 끌려간 시간을 감안하면 못을 박은 시간은-마가복음 15장 24절에 기록한 것처럼-제삼시(현재 오전 9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못 박힌 시간은 요한복음의 제육시 이후이며, 더 정확한 시간은 마가복음에 의하면 제삼시, 요한복음에 의하면 ‘제구시’가 됩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15장과 요한복음 19장에 나타난 예수님 죽으신 날과 시간은 불일치가 아니라 분명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특별기획 심층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성경권위를 훼손하는 역사비평학을 구체적으로 비판하여 성경신학이 어떻게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교계에 제시하고자 한다.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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