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0-11-08 17:0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공자의 처세술


子曰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자왈교언영색주공 좌구명치지  구역치지 닉원이우기인 좌구명치지 구역치지.
『논어』 「공야장」의 계속이다.
공자가 말했다. “교묘하게 말하고 안색을 꾸미고 지나치게 공손해 하는 것은 좌구명이 부끄러워하였는데 나도 또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상대에게) 원한을 숨기고서 그 사람과 벗인 척하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러워했는데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

본문에서부터 공야장이 끝나기까지 공자의 양심 내지 인생관과 관련된 내용이 출전하고 있다. 본문의 좌구명은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공자가 그를 인용한 것으로 보아 유명했던 사람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足恭’에서 ‘足’은 ‘주’로 읽히며, ‘지나치다(過)’라는 뜻을 가진다. 
좌구명은 일부러 말을 아첨하기 위해 꾸며서 말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낯빛을 바꾸어 억지로 친밀하게 하는 것도 싫어하였다. 지나치게 공경의 자세를 가지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싫어하였다. 그는 상대와 원망이 있어서 원수가 되어 있는 데도 그것을 숨기고 그 사람의 벗인 양 가장하는 것은 군자가 취할 태도는 아니라고 보았다.
정황으로 볼 때 공자가 자신이 직접 그런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좀 껄끄러운 것이 있어서 좌구명이라는 사람을 빌리는 형식으로 공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 않나 싶다. 공자는 본문의 강의를 많은 제자들이 있는 데서 행했을 것 같다. 그러면서 좌구명이라는 사람을 예로 들어 자신의 본심을 드러냈다고 보는 것이다.
언젠가 공자가 진나라에 있을 때 노나라에 남아 있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한 적이 있다. 그 계기는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제자 사랑이었다. “歸與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栽之”(귀여귀여 오당지소자광간 비연성장 부지소이재지.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야겠다! (우리) 제자들은 뜻은 크지만 (매사를) 소홀히 하고 (겉으로는) 빛나는 문체를 이루었지만 (그것을) 베어서 바르게 할 줄을 모르니까.” 공야장 5-21). 그의 제자들은 뜻을 크게 지니고 있어서 그 자체로는 훌륭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자기 절제 등은 훈련되지 않았다. 제자들의 이러한 생활자세는 공자가 다른 나라에서 만난 관료들의 위선적 행위와 대조되었다. 자신의 제자들은 서툴기는 해도 음흉하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겉으로 드러난 대로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기타의 인군(人君)이나 경대부들의 행위는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말과 행동이 다 꾸밈과 아부와 비굴한 것들이었다. 왕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대부가 마음속에서는 그를 원수로 증오하는 것이었다. 말은 그렇게 진실하게 하는 척하지만 전부 위선과 허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좌구명이라는 사람이 이들의 위선과 거짓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좌구명을 인용해서 공자는 그들을 비판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직접 그들의 위선과 거짓에 대한 품평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타인의 동의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그들을 직설적으로 평가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타인을 설정하여 증거도 보강하고 증인을 제시하는 것이 제자들에게도 교육적으로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당면하게 되는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믿음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신의 믿음 여부에 관심이 있다. 이때 경계해야 하는 것이 자신의 믿음을 꾸미기 위해 말을 교묘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억지로 은혜받는 척하는 얼굴 표정을 짓지 않는 것이다. 예배 시에나 교제를 할 때에 비굴할 정도로 공손해 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상대에 대하여 원한이 있는 데도 그것을 마음속에 숨기고 겉으로 형제 또는 자매인 양 다가가서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자신의 믿음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오히려 우리의 삶 속에서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진지하게 부끄러워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의미가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부끄러운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데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진정으로 부끄러운 일들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부끄러워하기에 고쳐나가는 학습을 하자.

그 옛날 청교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순례자의 길이라고 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살이가 순례길이다. 한 번 사는 인생을 교묘하게 말하며 억지로 말을 꾸며대고 지나치게 아부하면서까지 살아가야 하겠는가. 우리 단 한 번의 인생을 순례자가 될 수 있도록 소박하고 진솔하게 살아가자. 한편으로 삶의 부족한 부분들을 찾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순례의 길을 걸어가 보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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