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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작성일 : 21-04-05 22:2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허무주의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전쟁철학’ 논리


헤라클레이토스는 박식가인 헤시오도스가 밤으로 하여금, 따로 분리만 된 게 아니라 합일이 불가능하게 대립해 있는 신격으로서 낮을 낳게 한다는 이유로(《신통기》, 124), 대다수 사람들의 스승이라는 자가 자칭 가장 위대한 지식을 가졌다면서 낮과 밤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했다고 그를 비웃습니다. 왜냐하면 낮과 밤은 분리해서 생각할 대상들이 아니라 하나이자 동일한 관계의 대립적 측면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에베소(에페소스) 최고 귀족 가문 출신의 철학자, 대중을 선동하는 민주적 당파주의자들에 대항한 투사, 페르시아 제국의 옹호자로 비난받자 자기 고향을 떠난 철학자,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자연 만물은 필연적으로 전쟁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음울한 채 울고 있는 철학자, 논리적으로 사물을 인식하기보다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대표적 철학자 등, 이러한 많은 수식어를 달고 있는 철학자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os, 주전 540년경~480년경)다. 이 철학자에 대해 20대 중반 고전문헌학 교수 니체는 어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장차 니체가 전개하는 철학인 ‘허무주의’의 철학을 떠올려 본다면, 이는 이미 니체 철학의 초기부터 중요한 관심사임을 감지할 수도 있다. 니체는 서양철학사를 모든 가치들이 지속적으로 뒤집히는 과정 즉 가치 전도(顚倒) 혹은 전복(顚覆)을 뜻하는 ‘허무주의’로 규정한다. 이러한 니체의 허무주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연원(淵源)을 둔다. 이하에서 우리는 니체가 평가하는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핵심을 따라가 볼 것이다. 이로써 헤라클레이토스 시대부터 500여 년 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하는 서양 기독교에 고대 그리스 사상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나아가 니체 철학의 중요한 근원 하나를 밝히면서 철학과는 그 뿌리가 다른 기독교 진리의 순수함을 확인하는 한 계기로 삼고자 한다.

서양철학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 만물을 변화와 생성 혹은 운동 중심으로 처음으로 파악한 철학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에게는 자연 만물에서 고정된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인용한 본문을 좀 따라가면 헤라클레이토스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당시에 그리스 신화 창작으로 유명한 ‘그리스 교훈시의 아버지’, ‘그리스 서사시 대가 중 하나’로 불리는 헤시오도스(Hesiodos, 생몰년도 불분명)를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앞의 본문에서 보듯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 만물의 창조와 관련된 신화에서 밤과 낮의 원리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밤이 낮을 만들었다는 가상은 가장 위대한 지식을 가진 자(헤시오도스)가 할 소리가 아니라며 비웃는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볼 때 낮과 밤은 분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모두 같은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동일한 관계이며 단지 서로 대립하는 방식으로 상호의존하는 것들이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 심취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주전 6-5세기 당시 철학적 기준으로 ‘가장 순수한 유형’의 참지혜자(sophos)를 세 명으로 압축한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주전 569-475)와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소크라테스(Socrates, 주전 470-399)가 그들이다. 피타고라스는 종교 개혁가로서 현자(賢者)이며,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긍심을 지키며 고독하게 진리를 발견한 현자이며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어디에서든 영원한 참지식을 추구하는 자로서 현자다. 이 중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 만물을 지배하는 통일적 원리를 꿰뚫어 본 철학자로서 간주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 자신을 “세계의 통일적 법칙성을 인식한 유일한 사람”(310)으로 여겼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기본적으로 배타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니체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핵심 개념은 생성(Werden)과 정의(Gerechtigkeit) 그리고 투쟁(Streit)과 불(Feur)이다. 불은 물질 개념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무한 반복을 지배하는 운동 원리이며 그 상징이다. 하강과 상승 운동을 하는 불은 온기나 연기 혹은 사람의 입김을 만드는 결정적 인자(因子)로 비유된다.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것들의 일치를 자신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산 자와 죽은 자, 깨어 있는 자와 잠든 자, 젊은이와 늙은이가 동일한 것 안에 있다. 꿀은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다. 세계는 부패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내용물을 휘저어야 하는 항아리다. 삶의 밝은 태양빛과 죽음의 어둠이 같은 원천에서 흘러나온다.”(320).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극단적 대립의 자연 만물에 적응하는 지혜를 어린아이의 놀이에서 배우라고 한다. 그는 자연 만물을 “장기 돌을 모았다 흩트렸다 하며 노는 아이”(321)에 비유한다. 마치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았다 허물었다 하며 노는 아이와 같이 이러한 대립과 투쟁의 무한한 반복 과정이 우주 만물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조화라고 한다. 이것은 ‘생성’의 원리가 지배하며 이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정의(正義)’라고 한다. 가령 “선과 악은 활과 칠현금의 방식에 따라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다”(322)고 말할 때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선과 악의 실체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이후 그의 저서 ‘선과 악을 넘어서’에서 이 세상의 선과 악은 날조된 것으로 비판한다.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법칙에 대해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를 확정한다.) 어린아이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래성을 공들여 만들었다가 이내 뭉겨 버리는 것은 단지 놀이에 불과할 뿐이다. 모래성 쌓기와 파괴에서 무엇이 최선이고 최악인지 어린아이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놀이에서 창조주 절대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 만물 운행의 목적과 목표도 존재하지 않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혐오는 절정에 이릅니다. 아이는 장난감을 내던집니다. 그러나 유희를 하자마자 아이는 영원한 합목적성과 질서에 따라 유희를 이끌어나갑니다.-필연이자 유희, 그것은 곧 전쟁이자 정의입니다.”(332) 정리해 보면, 세계는 대립과 갈등, 투쟁과 전쟁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결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과정이다. 생성과 파괴는 필연적 과정이므로 목적을 설정해서는 안 된다. 세계와 역사의 운행 과정은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순간 필요가 없어져서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예술가가 공들여 작업하던 작품이 순식간 휴지 조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처럼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와 자연과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갈등과 투쟁과 전쟁 과정으로 보았으며, 거기에서 어떤 선과 악을 확정하는 것은 불의한 행위가 된다. 투쟁과 전쟁 상황을 통찰하고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정의이다. 이처럼 헤라클레이토스의 진정한 의도와 상관없이 그의 주장으로 인해 자연 지배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정복, 인류가 벌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문이 열리게 된다.

주전 586년 바벨론제국에게 망했던 남유다의 백성들이 페르시아제국 고레스 왕에 의해 포로 생활 종식과 유다 귀환명령을 받을 무렵, 에베소에서 출생한 헤라클레이토스는 고향을 떠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혼자 살며 세상과 인간에 대해 독특한 사상을 제기한다. 그의 사상을 따라가면 갈수록 자연 만물에서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여호와는 점점 사라진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자연만물을 지배하는 생성과 변화의 철학자로서 서양철학의 중요한 전통 한 축을 만든 사상가였다는 말은 동시에 그의 철학이 서양철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서양신학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그만큼 필요 없게 만든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연만물 자체의 논리를 찾게 하며 결국 창조주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이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역으로 증거한다. 이러한 증거를 우리는 자연만물과 인간존재의 허무함을 오직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파악한 솔로몬의 고백에서 다시 만난다.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1)

<207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흙수저 출신의 높아짐
부자를 도와 부하게 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