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1-07-01 21:3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고대 그리스 ‘존재론’의 결론:모든 존재의 세계는 모순과 혼돈이다


존재하는 것으로서 온 세계는 하나이고, 동질적이고, 분리되지 않았고, 생성되지 않았고, 불멸입니다-우리의 지성이 사물의 척도라고 가정한다면 말입니다.

위에서 니체가 말한 명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자’(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총칭) 개념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세계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되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배하는 원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확신이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세계가 통일을 이룬 하나의 단일체라면 그것을 간파하는 인간의 지성도 또한 영원불변의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을 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인간 지성의 고유한 능력을 이성(logos, 理性)이라고 한다.
니체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자에 대해 ‘무한정자(無限定者, apeiron)’라고 한다. 미세한 세계에도 한계가 없고 거대한 세계에도 경계가 없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말하는 현상세계를 초월하는 차원인 ‘물자체’와 연관된다고 하지만, 니체가 볼 때 칸트의 물자체는 관념적이며 비존재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무한정자를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한정자는 현실의 활동성을 강조하는 데 더 큰 비중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자는 다분히 물질적 세계에 비중을 두기 때문에 어떤 신적 요소를 강조하는 범신적론 관점과도 다르다. 니체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존재자는 인간 지식의 틀 속에서는 감각의 미혹을 받아 반드시 그 정체가 왜곡당한다. 이런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에게 문법과 논리학은 참된 존재자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미혹과 사기술이다.
하지만 니체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자 정체에 대한 주장은 공허하며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비생산적 개념이라고 혹평한다.(355) 니체는 철학의 영원한 과제인 ‘존재자’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공허’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간파한다. 다시 말해 “영원하며 변화하지 않는, 모든 방향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떠도는, 모든 지점에서 같은 정도로 완전한 전체”(351)를 의미하는 존재자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해명하고자 하면 할수록 더 미궁에 빠진다.
니체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서 존재자 규명을 위해 ‘대화술’을 처음으로 철학에 도입한 철학자 제논(Zenon of Elea, 주전 495년경-430)을 소개한다. 제논도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자’를 무한정자(das Unendliche)라고 한다. 즉 존재자는 무엇을 추가해도 더 크게 되지 않고 무엇을 제거해도 더 작게 되지 않는 것이다. 제논의 무한정자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존재자 논의의 필연적 귀결인 ‘모순’ 문제다. 제논에게 수(數), 공간, 시간 등은 어떤 실체가 아닌 관념으로 증명 대상이 아니다. 니체는 이러한 사실을 참조하여 “우리는 사물이 존재하는지, 또는 운동이나 공간이 존재하는지 그 자체로는 알지 못합니다”(363)라고 한다. 언어를 통한 존재자에 대한 모든 논의는 필연적으로 자기모순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확정해 준 것이다.
니체는 이 문제를 “상대적인 우리의 통상적 관찰 방식 간의 모순”(362)이라고 한다. 관찰 방식의 모순이란 모든 사실에는 반드시 그 반대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말에는 언제나 ‘어떤 이의 본성은 반드시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항상 포함한다. ‘최고 존재인 신은 존재한다’는 명제는 ‘최고 존재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적어도 하나는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포함한다. 이는 어떤 확실한 지식을 인간이 자기 경험을 통해 결코 포착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식 활동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모순과 존재자 이해의 불가지론적 특성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존재자의 정체성 규명 시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황이다. 니체는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정리한다. “우리의 표상들을 영원한 진리들aeternae veritates로 보는 모든 방식은 모순으로 이끈다.”(363)
영원한 존재를 취급하므로 영원한 진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이다. 영원한 존재는 영원한 비존재의 문제를 항상 동반한다. 진리에 대한 확증은 비진리의 필연성도 그만큼 확연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점을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주전 500년경-428)도 감지하고 있었다. 아낙사고라스는 인간 정신(정신(精神, nous, Geist)에 내재된 상호 모순된 특성을 지적한다. 즉 ‘능동적 정신’과 ‘수동적 정신’의 대립이다. 능동적 정신은 생명력 혹은 활동력 자체를 의미하며, 수동적 정신은 인간에 의해 파악된 정신이다. 그리고 능동적 활동성의 정신은 자신의 외부 세계로 향하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을 ‘회전운동(perichoresis)’(373)으로 설명한다. ‘페리코레시스’는 두 상대가 상호침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특성을 말한다. 먹고 먹히는 관계다. 이러한 회전운동은 시작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이 선명하지 않다. 수동성과 능동성이 교차한다. 적극 수용한 것인지 억지로 강탈당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모순을 드러내야만 하는 정신(nous)의 운동논리는 질서의 로고스(logos)와 무질서의 혼돈(chaos)의 경계를 없애 버린다. 이렇게 니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에서 모순과 대립, 갈등의 투쟁의 필연성을 간파한다. 모든 활동을 지배하는 무질서와 혼돈에 대한 통찰은 향후 니체철학에서 인간의 삶을 ‘권력의지’가 지배하는 대립과 갈등의 운동구조로 파악하는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니체의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이러한 지적 통찰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그 사건이 왜 그렇게 그러한 방식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 그 필연성을 알 수 없다. 초월적 필연성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인류 역사상 여호와 하나님 중심에서 모든 존재자의 비밀을 간파했던 지혜자(sophos) 솔로몬의 지혜를 잠시 빌려보자.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1)
<211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병든 제자와의 이별이 주는 교훈
벼슬을 탐하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