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2-07-13 19:4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배반 없는 배움


子曰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자왈군자박학어문 약지이례 역가이불반의부

논어 옹야장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이렇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널리 글(학문)을 익히고서 (그것을) 예로써 요약한다면 (그 배운 것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글(文)’은 도와 관련된 일체의 학문이다. ‘약(約)’은 요약함이다. 군자는 널리 배우고자 하며, 그 배운 것을 지킴에 있어서는 그 요약(체)으로써 한다. ‘반’은 도에 배반하는 것이다. ‘의(矣)’는 강조 또는 단정의 허사이고 ‘부(夫)’는 감탄 또는 강한 긍정의 허사다.

정자(程子, 1033~1107)는 군자가 “글을 널리 익히고서 예로써 요약을 하지 못하면 반드시 산만한(법도가 없이 방황하는) 처지에 이를 것”으로 보았다(博學於文而不約之以禮 必至汗漫. 박학지어문이불약지예 필지한만). 그래서 “널리 배우고 또한 능히 예로써 지켜 법도를 따를 때 또한 도를 어기지 않는다”(博學矣 又能守禮而由於規矩 則亦可以不畔矣夫)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의 일체의 배움은 각각의 그 나름의 도를 익혀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은 도, 더 바른 도, 더 잘 갖추어진 도를 얻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많이 읽고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나름의 도를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글들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어느 한 분야를 익히면 그다음의 또 다른 분야를 익혀야 하는 것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 길의 끝이 없다. 그래서 학문의 길을 ‘산 넘어 산’이라고도 하였다(博學於文).
그런데 무작정 읽기만 한다면 그 핵심이 잡히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한정 없이 읽기만을 되풀이하게 된다. 물론 죽지 않는 한 그 일을 계속할 때 나름의 뭔가가 잡힐 수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인생에 한계가 있으며, 스스로 지칠 수 있고, 끝없는 사유의 방황 속에 빠져들 수도 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읽어도 그때마다 그 책의 요체를 잡아 이해해 갈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요체를 세워갈 때 학문의 성숙 내지는 도의 세워짐이 있게 된다(約之以禮).
이 도가 세워진 사람은 더 이상 이 도에 어긋나는 일을 하기가 어렵다. 배운 것이 자신 안에 굳건히 세워져 있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규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양심과 행동이 자신 안에 세워져 있는 도(道)와 상충된다면 사람은 그것을 어기면서 할 수 없게 된다. 더욱이 군자라면 자신 안에 세워져 있는 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 도를 따르는 것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위태롭게 한다 하더라도 그래야 한다.

이러한 배움과 실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익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생활을 온 힘을 다해 영위하고자 해야 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나온 그 순간들 전체로부터 나름의 요점을 하나님 뜻과 사랑 안에서 찾아가야 한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는 상황들을 많이 만들어서 널리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러한 삶을 통한 배움 속에서 느껴진 하나님의 뜻과 사랑의 쌓여짐이 자신의 생활의 준거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이 하나님의 뜻과 사랑의 도를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 그 구체적 결론은 우리의 생명이 다하도록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행 1:8)
선한 그리스도인이여! 오늘의 생활에 충실하자. 이 생활에 지치지 않고 하루하루의 생활을 충성으로 계속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배움이다. 그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발견하고 법도를 세우자. 그리고 그 도를 좇아 증언자의 삶을 살아가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마흔넷. 21세기 기독교의 변질: ‘정치 권력적’ 보수화
군자는 어리석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