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3-01-11 19:5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마흔여덟. 성경권위 부재(不在) 속의 초대교회의 세속화 I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337/재위 306-337)는 초대교회사를 이해할 때 의미 있는 인물이다. 동방 정교회는 그를 성(聖) 콘스탄티누스(Sanctus Constantinus Magna)로 칭하기도 한다. 첫 번째 기독교 로마 군주로 알려진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면서 제국의 기독교 박해 종식을 선언한다. 압류했던 교회 재산을 돌려주는가 하면 그 피해를 국가가 보상도 해주었다. 324년 마지막 정적(政敵) 리키니우스를 제거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등극한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제국의 권력과 부와 문화는 동로마 제국 수도 비잔티움(콘스탄티누스 죽음 이후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플로 명함. 현재 명칭은 이스탄불)으로 집중한다. 그런데 권력을 잡은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29세 된 아들 크리스푸스를 계모와 간통 혐의로 몰아 고문 끝에 사형한다. 그런가 하면 아내 파우스타도 목욕 중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죽인 무자비한 군주였다.
그에게 예수는 죄인을 사랑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린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다. 예수는 전쟁의 신이었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할 때 그가 경험한 예수는 정복의 수호신이었다. 그가 보았다는 환상에 대한 고백이다. “태양 위 하늘에 빛의 십자가와 이것으로 정복하라는 글씨”*를 보았다고 한다. 로마의 태양신 숭배를 상기시키는 내용과 십자가의 조합 그리고 전쟁 승리의 상징으로서 십자가의 의미는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결과적으로 환상을 보고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에 막대한 부를 제공한다. 이는 로마 제국 곳곳에 성당 건축의 붐을 후원했으며 50개의 성경 사본도 기부했다. 이 사본은 모두 양피지로 만들었는데 추정하는 동물의 숫자는 소 5천 마리의 희생이 필요했다고 한다. 성경 사본 가운데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은 지금까지 전한다.(311 참조) 황제 후원의 일번지는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로마 제국 신전(神殿)에 있던 귀금속들도 성당 건축을 위해 옮겨졌다.
그는 기독교 성직자에게는 세금 면제 법령을 반포했으며 사유재산 소유를 승인했다. 검투사 시합을 금지하는가 하면 십자가형을 금지하고 교수형으로 대체했다. 이렇게 황제의 후원을 받으며 부와 권력을 손아귀에 넣은 교회는 진리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교권 투쟁에 몰두하게 된다. 비잔티움 주변의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사들은 교세를 확장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대도시 교회에서 벗어나 겸손과 청빈의 공동체를 수립하고자 외지에 수도원을 건립했지만, 수도사들은 대도시 “교회의 생활과 관심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수도사들과 수도원 지도자들은 (……) 정치적 투쟁을 복잡하게 만들어 겸손, 사랑, 용서에 대한 구세주의 경고로부터 떨어져 보이는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했다.”(338) 권력을 키운 수도사들은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교회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그리고 그 권세의 영광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를 보면서 모든 교회를 지배하려는 패권 경쟁 속에 뛰어들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분열된 제국을 자신의 통치 하에 모두 통일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용서’의 명분을 내세워 교회 일치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황제가 생각한 교회 일치에 대한 신념에 대해 교회사가 맥클로흐는 이렇게 설명한다. “콘스탄티누스의 공식적 대응에는 명백하게 냉소적인 정치적 계산보다 더 깊은 고충과 이해가 있었다. 교회의 일치에 도전을 주는 것은 무엇이든 최고의 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황제에 대한 사랑을 끝내는 것”(339)으로 여겼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의한 기독교 대(大) 박해 시대에 배교(背敎)했던 자들과 이것을 반대하는 도나투스파(Donatist)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배교자를 감독으로 세우는 것에 대해 황제의 화해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나투스파는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배교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황제는 군대까지 동원했지만 배교자에 대해 불관용을 주장하는 자들을 막지 못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로마 제국에 의한 기독교 대 박해가 끝나고 이제 새로운 대 박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즉 “그리스도인에 의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340), 기독교 내에서 형제가 형제를 학살하고 추방하고 정죄하는 종교재판 참극의 시발점이 된다.
이러한 기독교 내의 정쟁(政爭)과 다른 종파에 대한 탄압은 신학 논쟁 과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에 유명한 신학 논쟁이 있었다. 바로 아리우스(Arius, 250/256-336)에 의해 야기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부정을 둘러싼 사건이다. 그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신은 알려질 수 없는 존재이므로 예수는 하나님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고의 하나님은 하나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모든 세상 이전에 창조되었고 태어났다고 받아들일지라도 이것은 그리스도가 어떤 면에서 아버지 이후에 나왔고 아버지와는 다르다”(341)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그의 반대자들은 ‘그리스도가 없었던 때가 있었다’는 문장 사용을 이유로 그를 기소했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아버지는 나눌 수 없는 존재이므로 아들(그리스도)은 ‘무(無)’에서 창조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아버지보다 열등하고 종속적이며 아버지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342) 아리우스가 볼 때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일 수 없다.
이에 황제는 종교회의를 소집한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 황제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344)이라 공포했다. 하지만 ‘호모우스오스’는 성경에 없는 개념이라며 아리우스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가 사용하는 개념이라며 반발했다. 이 개념 하나로 인해 제국의 교회는 50년 이상 분란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황제나 각 종파들이나 모두 ‘성경권위’를 등한시(等閑視)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대부분의 신학 논쟁은 성경권위에 호소하거나 의존하려는 태도는 보이질 않고 철학적 논쟁과 정적 죽이기를 반복하는 그야말로 슬픈 역사가 이어진다. 이단으로 정죄 받았던 아리우스는 친구 유세비우스의 도움으로 사면된다. 하지만 반대파의 감독들은 황제를 이용해 반대자들을 다시 기소하게 하고 추방한다. 이러한 진흙탕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황제를 이용해 교권을 잡고자 혈안이 될 뿐 교회의 유일한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 절대진리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데서는 점점 멀어진다. 기록한 말씀의 권위를 배제하고 벌이는 모든 신학 논쟁은 그 자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일 뿐이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후원을 받으며 세속 권력의 꿀맛을 본 4세기 초대 기독교는 진리 없는 교회라는 비극의 시대로 빠져든다. 진리 암흑기의 중세 천년이 이렇게 준비되고 있었다.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7-19)


<236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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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amaid MacCulloch, A History of Christianity; The First Three Thousand Years, 박창훈 역, 『3천년 기독교 역사 I: 고대사』(서울: CLC, 2013년), 310. 이하 쪽수는 괄호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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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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