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2-11-30 20:5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육신부터 육체까지


2022년 10월 가을에 대한민국 서울에서,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이 땅에서 육신을 벗었다. 이러한 육신(肉身)에 온 마음을 쏟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육신과 육체(肉體)를 약간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구별이나 차이를 짧은 지면에서 성경에 바탕을 두고서 밝혀보고자 한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논리적인 서술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논리적인 서술은 전체의 주제가 있어야 가능하다. 전체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머리에서 발바닥까지이다. 이 과정에는 몸 안의 오장육부도 있다. 모든 분야에서 전문(專門)은 전체장악과 매우 밀접하다. 전체의 체계에서 이 체계는 속뜻에서 목차와 아주 밀접하다. 체계적이고 논리적임은 그 자체로 목차가 있다는 의미이다. 육신과 육체를 구분하기 위해서, 두 소제목으로 중심을 잡았다. 그 두 소제목에서 중심적인 용어는 사람과 동물이다.


1) 육신은 男女(사람)에만 한정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언약대로 성취됨에 있어서 핵심이다. 이 “육신”에 육체가 들어가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문제들이 발생한다. 성경 전체에서, “육신”은 50회 정도이고, “육체”는 120회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남성(男子)의 몸을 지니시고 오셨다. 이 육신은 로마서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부활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다. 복음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시기 때문이다. 이 육신은 신명기 5장에 처음 나온다. 여기서 육신을 가진 자는 사람과 연결되고 연계되어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단지 6회(신, 대하, 욥, 잠, 전, 겔)만 사용되고 있고, 대부분 신약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태복음 26장에는, 예수께서 “마음이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신 말씀이 나온다. 마음은 사람에게 있어서 핵심이다. 동시에 마음은 사람에게만 있고, 동물(짐승)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육신에 죄를 짊어지시고 오셨다. 이 죄도 사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육신과 육체의 구분이나 한계 등은 때로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 이 땅에 오신 육신대로 음부에 버림을 당하지 않으시고, 또 썩지 않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물(祭物)로서 이 땅에 오셨음이 강조될 때는 “육체”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성경의 제물은 어린 양 등과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육신에 속(屬)한 자는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다.


2) 육체는 動物(짐승)까지 포함한다 

여호와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육체는 동물에서의 짐승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 모양이나 양상 등에서 사람의 육체나 물고기의 육체 등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 육신과 육체는 여러 곳에서 같이 사용되어도 무방하다. 육체의 생명은 피(血)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육체가 안전히 거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때문이다. 이것은 무지개 사건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육체가 거(居)한다는 자리에 육신으로 대치되어도 무방하다. “육체와 마음”으로 열거되는 것은, 육신과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정리되어 기록되었다. 대등관계로 나열되지 않고 “육신의 생각”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육체”가 사용된 120회에서, 100회 이상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구별 지어 보고 해석하는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모든 육체가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이 땅의 생사화복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기 육체를 성전(聖殿)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 또한 얼마나 중요한가? 솔로몬의 성전은 이 육신(육체)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성전에서 “성(聖)”은 머리에, “전(殿)”은 사지(四肢)와 5장6부 등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 “육체”는 고린도서에 제일 많이 나타난다. 고린도후서에 대부분 사용되고 있다. 고린도후서 13장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매우 요긴하다. 이 “육체”는 생사(生死) 문제에 더 깊이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에서, 그 속의 의미는 결국 본질적으로 참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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