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3-04-11 21:5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령의 부어짐(6) 신이 말함을 들을 수 있는 인간


2. Durch die Ausgießung des Heiligen Geistes wird es darum in der Freiheit des Menschen möglich, daß ihm Gottes Offenbarung widerfahren kann, weil ihm in ihr durch Gottes Wort ausgeredet(told) wird, daß er zu solchem Widerfahrnis(경험) eine eigene Möglichkeit hat. * eigene는 own으로 번역하는 사례가 있고, 신준호는 ‘고유한’으로 번역했다. Ausgießung des Heiligen Geistes = 독일어 사전에서 “성령 충만”으로 번역한 사례가 있다.
2. By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it is possible in the freedom of man for God's revelation to meet him, because in it he is explicitly told by God's Word that he possesses one possibility(하나의 가능성) of his own for such a meeting(CD., 257). 성령의 부어짐을 통하여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수여된다는 사실이 다음의 이유로써 인간의 자유 안에서 가능해진다: 즉, 인간에게서, 인간이 그러한 수여에 대하여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전적으로 부정됨으로써 계시가 수여되는 것이다. (신준호, 323). KD., 280, CD., 257, GG., 323.

“성령의 부어짐”과 “신의 말함”에서 인간은 신의 계시를 경험(Widerfahrnis, 혹은 만남(meet))할 수 있다. 신준호는 ‘수여’로 번역했다. 그리고 신준호는 ausgeredet(told)를 ‘부정’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신준호의 번역은 바르트 문장에 대해서 문자적 번역과 의미적 번역에서 적당하지 않다. 필자는 이렇게 바르트의 문장을 번역했다. “성령의 부어짐을 통해서 인간과 신의 계시가 만나는(경험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 안에서 가능하게 된다. 즉 인간이 신의 계시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신의 말씀에서 말해지는 것에서 만날 가능성을 소유하게 된다.”

바르트의 특징은 ‘가능성(Möglichkeit, possibility)’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가능성이란 잠재태와 현실태를 말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바르트는 신학을 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가능성을 현실태로 바꾸는 에너지를 성령의 부어짐, 신이 말함(told by God’s Word)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통 신학에서는 ‘가능성’을 취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성에 근거한 것이 정통 신학이기 때문이다. 가능성의 문제는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첨예한 논쟁이 진행되었고, 가능성(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거부되었지만 결코 포기되지 않고 계속해서 주장되고 있다. 16세기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하면서(노예의지) 인문주의와 결별했다. 바르트는 루터의 개념(인간의 가능성 부정)을 반복하면서도 가능성에 대해서도 무한하게 개방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는 바르트가 말하는 성령의 부어짐(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의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성경에서 부으심(anointing)은 주께서 부으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요일 2:27, the anointing which ye have received of him abideth in you).

바르트는 인간이 신(神)에 대해서 자유가 없다는 것(unfrei)을 제시한다(GG., 323). 바르트는 계시 안에서 명백하게 신의 말씀이 있는데, 인간은 그 신에 대해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앞에서 “계시 안에서 명백한 것”이 신의 말씀인데 아들(the Word or the Son of God)이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바르트가 규정한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바르트가 훌륭한 실력자라도 개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한 개인이나 유수한 집단이 아닌 오직 주 예수로 말미암아 구성되어야 한다.
바르트가 인간의 부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마치 인간의 전적부패를 제시하는 것 같다. 그 전적부패를 살리는 요소는 인간의 구세주가 필요할 것인데, 바르트는 구세주를 하나님이라고 규정했다(er selbst tritt auf den Plan, um des Menschen Heiland(man’s Saviour) zu sein). ‘구세주(Saviour)’를 ‘하나님’으로 규정하는 것은 바르트의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구세주(Saviour)’는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하는데 바르트에게 와서 ‘하나님’으로 전착되었다.

바르트는 인간의 결핍과 세상의 타락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가 출생했다고 제시했다(GG., 324). 바르트는 인간의 자유가 신과 만남 혹은 경험할 수 없는 수준임을 명시한다. 그래서 인간은 신에 대해서는 어떤 능력도 갖지 못한 부자유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인간이 신과 함께할 수 있는 조건을 그리스도 안으로(in Christus) 규정했다. 바르트가 그리스도 안에서를 규정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 안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특수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기독교의 특수성 개념은 독단적인 자세에 불과할 것이다. 메이천 박사는 사도 바울이 배타적 복음(The exclusive gospel)을 전한 것으로 밝혔다.

결국 바르트는 인간 안에서 신과 만남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야만 한다. 신의 말씀을 인식할 때에 인간은 자유롭게 된다. 그 실제의 자유(tatsächliche Freiheit, actual freedom)는 기적이다. 그래서 인간이 신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닌 인간에게 다가온 신(神)의 말씀의 자유(in der Freiheit des zu ihm gekommenen Wortes Gottes)에 근거한다. 바르트는 반복해서 인간 편에서 자유와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신과 만남, 신의 말을 들음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신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가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면서 신과의 만남이 가능하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오직 신의 자유에서 만남(경험)을 추구해야 한다.

바르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자기 결단을 드러내는 형태를 세리와 바리새인(the form of a publican’s Pharisaism)으로 평가했다. 세리는 ‘배신’이고 바리새인은 ‘교만’이다. 이렇게 인간이 자기 자유와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는데, 이것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라고 제시했다(GG., 326).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은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판단 규범이다. 만약 인간에게 자기 부인이 명료하게 드러났다면 성령의 능력이 있는 것이 된다. 마치 방언을 성령의 현상으로 평가하는 진영에서, 방언 현상을 성령의 은사로 규정하는 패턴과 유사하다. 자기 부인이 실현되면 성령의 능력이 그에게 있다고 본 것이다. 바르트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자유를 투입시키는 것으로 분석했다(GG., 327).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인간이 연합되는 것을 하나님의 승리(Triumph Gottes)로 규정했다(GG., 327). 바르트는 인간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 성령의 능력이라고 성서에서 증언하고 있다고 밝힌다(GG., 327). 바르트에게 성령의 작용은 “말씀과 함께 혹은 말씀을 통하여” 구도가 아닌 “자유로운 성령의 활동”을 제시하고 있다. 그 성령의 능력이 유일한 가능성이다. 성령의 능력은 가난과 비참함, 죽음에서 구원하는 가능성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풍요, 고양(높게 됨), 존재의 생명이 전달된다(GG., 327). 바르트의 성령 개념은 전혀 인정할 수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도록 하는 구속의 영이다. 바르트는 성령으로 고백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라는 피상적인 개념을 제시하고 있으며, 풍요와 고양과 존재의 생명으로 연결시켰다. 성령의 특별사역은 오직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으며 고백하며 전하는 것이다. 포괄적이거나 피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삶의 풍요나 생명과 다른 영역이다. 결국 바르트는 인간이 성령으로 신의 말을 들음으로 풍요와 높아짐을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거기에 그리스도 안이라는 의식도 포함시키기 때문에 바르트가 신학자로 분류될 수 있지만, 정통 신학자는 될 수 없다. 정통 신학에서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이시기 때문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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