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6-01-10 21:0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제 3 부 (11장~19장) 성도의 칭의


칭의의 목적

여기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칭의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칭의의 목적을 인간의 구원에서 찾으며, 행위에 선행되는 의(義)로 규정한다.

하나님의 의(義)는 우리의 구원의 근거이다. 하지만 이 의는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의롭다는 의미에서의 의가 아니라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의미에서의 의이다. 이것은 행위들로부터 오는 사람의 의와 구별하여 하나님의 의라 불린다. 행위들에 의한 이러한 사람들의 의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인 윤리학(Ethics) 제3권에서 분명하게 서술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의는 사람의 행위들에 수반되는 것으로서 그 행위들에 의해 생겨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이와 달라서 그 판단에 의하면 의(칭의)는 행위에 선행하고 선행들은 그 의로부터 점차 생겨난다.


위에서 정리된 칭의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행위에 선행된 믿음에 의한 의로 규정하는 데서 복음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관점을 인간의 구원과 수혜자 인간에게만 한정해서 취급하는 것이 구속사의 한계로 판단된다. 복음적인 칭의 교리는 죄인을 의롭게 하여 구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속사역으로 규정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자신의 계시사역적인 관점에서 정리될 수 있다.
그리스도 사역의 핵심은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는 데 있으며, 이에 대해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롬 1:17)라는 의미로 설명한다. 따라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는 창세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우신 하나님의 뜻대로, 구약에서는 그리스도 오실 것을 언약하시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성취하신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義)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선택한 백성들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칭의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신학의 쟁점을 인간의 ‘행위’와 ‘믿음’이라는 도식에 편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총합적인 계시사역으로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 칭의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기초하며, 언약한대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심으로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존재확증을 근본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칭의는 계시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선택한 언약 백성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 것이다. 따라서 칭의의 근본 목적은 그리스도의 언약성취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존재 확증에 있으며, 직접 목적은 창세전부터 선택한 언약백성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다.

계시적 관점에서 본 칭의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정리하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신학의 단초이며, 자기 계시의 원리이고 성경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근간이자 신(神)존재 확증의 단서가 된다. 예정론(작정)은 신학의 총체적인 기초이며,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통로이며, 모든 신학적 주제들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원리이다.
칭의 교리는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원한 작정에서 성취로 귀결된다는 것을 정리해 보자. 작정(뜻, 계획)은 영원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이고, 시간(피조)세계 섭리사역의 근간이며, 기초로서 원리가 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는 바울의 증언대로, 창조 때부터 이미 종말의 역사를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의 역사를 직선적으로 섭리하신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에 기초해서 구성되어 있다.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복을 인류의 시조인 아담에게 동일하게 언약하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허락하신 복은 문화명령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실체적인 언약이다. 이유인즉, 복의 내용은 자손(국민), 땅(국토), 통치(국권)로서 국가의 요소이기 때문이며, 이 삼대언약은 창세전에 작정하신 복인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정하신 “기업”으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며, 이 복은 아담에게 삼대언약으로 구체화 되어 수립되었고,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라엘 나라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체계는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 순서에 따라 아브라함의 씨를 따라 자손이 번창되고(창~민30:), 가나안 땅을 정복하며(민31:~삿), 왕정국가 창건, 분열, 회복되는 순서로 구성된다. 그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기초가 되시고(사복음서),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교회가 설립(행), 양육(롬~갈), 무장(엡~몬), 투쟁(히~유), 승리(계)라는 체계로 구성된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종국과 행위까지라도 창세전부터 작정하셨으며, 그 계획대로 만사를 섭리해 가시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의(義)를 자처하기란 상상조차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선행의 의미

칼빈은 16장에서 칭의의 교리에 오명을 씌우기 위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 비난에 대해서 반박한다.

우리가 사람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며 선행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자, 일부의 불경건한 자들은 우리가 선행을 완전히 부인하여 선행을 추구하는 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비방하고, 또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이 값없는 죄 사함에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두고 의로 향하는 길을 너무 쉽게 만든다고 비방하기도 하며, 또한 우리가 이렇게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이미 죄를 향하여 너무 많이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을 더욱더 죄를 짓도록 꾀인다고 비방하기도 한다.

이 사람들은 공로를 강조하여 율법에 대한 일종의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복종을 억지로 조장하려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과 노선을 달리 한다고 해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선행을 장려할 근거를 제거하고 있다고 거짓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교리를 가장 첫머리에 두지 않는다면, 행위를 말씀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를 먼저 흡수한 사람이라야만 거룩한 삶을 추구할 힘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복음적인 칭의론에서, 선행으로 구원 얻음을 부인하며, 칭의를 얻게 되는 것에 대해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죄를 방치한다는 교황주의자들의 주장을 일축한다. 교황주의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은혜만 전적으로 강조되면, 인간이 나태해지고, 범죄에 방임(放任)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인간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선행하게 되는지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성경적인 선행의 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을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중략)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용문을 정리하면, 인간의 선한 행위는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일이고, 선한 행위의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을 성취하기 위한 것에 있으며, 그 동력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깨닫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선악 간의 모든 행위는 인간의 독자적인 의지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확립된 칭의의 교리야말로 깨닫는 만큼 선행의 ((동기가))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에 의한 공로를 통해서만 확연히 깨닫게 된다. 인간의 선행은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 믿어지면 선한 일을 행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여호와의 영원성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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