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6-08-25 21:0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여호와의 자비성 찬양


제5장 여호와의 자비성 찬양
제1절 조건없는 사랑의 언약
(아 1:∼5:1)

1. 처음 사랑의 언약 (1:∼2:7)

1: 5∼ 6  신부의 미모와 누추함에 대한 아가와 변명을 노래함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 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으로 신부의 자기 미모에 대한 아가와 누추함에 대한 변명을 노래하도록 섭리하시는 내용이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揮場)과도 같구나”라는 신부의 아가를 노래했다. 여기서 “예루살렘 여자들”은 솔로몬 왕을 사모하며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고 있는 여자들을 말하며(아 3:10),  “게달의 장막”은 아랍의 유목민들이 염소 털로 만들어 사용하는 검고 거칠은 장막을 말한다. 그리고 “솔로몬의 휘장”은 솔로몬이 사용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막을 말한다. 신부는 자기가 비록 아랍 유목민들의 장막처럼 검고 거칠지만 솔로몬이 사용하는 화려한 막처럼 아름답다는 뜻으로 자기 미모에 대한 아가를 부른다. 이러한 신부의 아가를 솔로몬이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라는 누추함에 대한 신부의 변명을 노래했다. 그 까닭은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신부를 그 오빠들이 자기들의 포도원지기로 삼았기 때문이라며 노려보지 말라는 뜻으로 변명한다. 이러한 누추함에 대한 신부의 변명을 솔로몬이 노래한 것이다.
이 노래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부르신 아브라함은 우상을 숭배하는 데라의 아들이다(수 24:2).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가 의롭거나 깨끗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의해 선택되어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솔로몬이 시문학적 방법에 의해 노래한 것이다. 이러한 솔로몬의 노래는 신랑과 신부 사이에 처음 맺은 사랑의 언약에 대한 노래를 통하여 조건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하려는 것이다. 곧 창세 전에 작정하신 뜻에 의해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조건 없는 영원한 사랑을 시문학적으로 노래하는 것으로서, 나아가서는 창세 전에 택한 백성에게 사랑의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의 자비성을 찬양하는 것이다.     
 
1: 7∼ 8  신부와 신랑이 서로 만날 방법에 대한 약속을 노래함

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으로 신부와 신랑이 서로 만날 방법에 대한 약속을 노래하도록 섭리하시는 내용이다. 솔로몬은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라는 신부의 요청을 노래했다. 여기서 “얼굴을 가리운 자”는 몸을 파는 거리의 여자를 말한다. 신부는 자기가 양떼를 먹이는 신랑의 친구에게 몸을 파는 거리의 여자같이 보여질까 염려하면서 신랑을 정확히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려달라고 하는 요청을 솔로몬이 노래한 것이다. 솔로몬은 어떤 것이 쾌락인지를 알고 싶어서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했었던 일이 있다(전 2:7하). 신부는 신랑의 양떼 먹이는 장소에서 신랑을 만나고 싶어서 그 곳을 알려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자 신랑 솔로몬은 여인 중에 어여쁜 자기 신부에게 만날 장소를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양떼를 먹이는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이라고 노래했다. 여기서 “너의 염소 새끼”라는 말은 신랑 솔로몬이 신부에게 선물한 염소 새끼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에 유다가 다말에게 사랑을 요구할 때 염소 새끼를 주기로 약조한 사실이 있다(창 38:17). 그와 같이 솔로몬이 신부에게 사랑의 선물로 염소 새끼를 준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은 신부에게 자기를 만날 장소를 모르겠거든 이리 저리 헤매지 말고, 자기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이 머무는 장막에 이르러 자기가 선물로 준 염소 새끼를 먹이고 있으라는 뜻으로 노래한 것이다.
이 노래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여호와를 위하여 세겜 땅에서 단을 쌓고, 다시 벧엘과 아이 사이로 옮겨 단을 쌓고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창 12:6∼9). 그후 애굽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단을 쌓았다(창 12:10∼13:18). 그리고 얼마 후,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하신 말씀에 따라 아들 이삭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에 단을 쌓았다(창 22:1∼9). 또한 다윗 왕이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려 불로 응답을 받았다(대상 21:21∼27). 그런데 그곳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만날 수 있는 전을 건축했다(대하 3:1).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솔로몬이 시문학적 방법에 의해 신부와 신랑이 서로 만날 방법에 대한 약속을 노래했다. 이러한 솔로몬의 노래는 신랑과 신부 사이에 처음 맺은 사랑의 언약에 대한 노래를 통하여 조건 없는 여호와의 크신 사랑을 찬양하려는 것이다. 곧 창세 전에 작정하신 뜻에 의해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조건 없는 영원한 사랑을 문학적으로 노래하는 것으로서, 나아가서는 창세 전에 택한 백성에게 사랑의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의 자비성을 찬양하는 것이다.

1: 9∼11  신랑이 신부의 미모와 사랑의 선물 만들 것을 노래함

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으로 신부의 미모와 사랑의 선물을 만든다는 것을 노래하도록 섭리하시는 내용이다. 솔로몬은 자기의 사랑인 신부를 향해, 바로 병거의 준마(駿馬)에 비하였다고 노래했다. 여기 “바로의 병거의 준마”는 애굽 왕 바로의 병거를 끄는 가장 잘 생긴 말을 가리킨다. 그렇게 잘 생긴 말처럼 자기 신부가 위풍이 있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신부의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신부의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다고 노래했다. 곧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머리털로 볼을 단장하고 목에는 구슬 꿰미 목걸이로 단장한 것이 아름답다는 뜻으로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솔로몬은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고 노래했다. 여기서 “우리”는 솔로몬과 궁녀들을 가리키는 대명사다. 곧 신랑 솔로몬이 궁녀들의 손을 빌려 신부에게 선물로 줄 금으로 만든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겠다는 뜻으로 노래한 것이다. 결국, 솔로몬은 자기를 만나려고 아름답게 단장을 하고 찾아온 신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자기와 궁녀들이 신부에게 사랑의 증표로 선물을 마련하겠다는 뜻으로 노래한 것이다.
이 노래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그에게 삼대언약을 세워주시고 그 언약을 자손에게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것에 대한 증표로 아브라함이 드린 제물에 불을 내려 응답해 주셨다(창 12:∼22:).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솔로몬이 시문학적 방법에 의해 노래한 것이다. 이렇게 솔로몬은 신부의 미모와 사랑의 선물을 만든다는 것을 노래했다. 이러한 솔로몬의 노래는 신랑과 신부 사이에 처음 맺은 사랑의 언약에 대한 노래를 통하여 조건 없는 사랑을 찬양하려는 것이다. 곧 창세 전에 작정하신 뜻에 의해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영원한 사랑을 시문학적으로 노래하는 것으로서, 나아가서는 창세 전에 택한 백성에게 사랑의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의 자비성을 찬양하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용기 원로연구원 (성경신학학술원)

여호와의 자비성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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