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2-07-22 23:2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하나님 중심사상의 말씀운동


# 태초에 말씀이 계셨나니

필자는 이 시대 우리에게 21C 신학의 혁명인 성경신학에 근거한 말씀운동(Logos-Movement)이 함축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 이셨다. 그 분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2). 여기서 ‘태초’의 의미는 시(時)·공(空)·형(形)의 피조 세계에서의 역사적 시간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시공형을 내재한 상태에서 입체적으로 초월하는 영원한 시점(永遠/eternity)을 의미하는 개념이다(박용기 목사, 성경강론집 14권 p.7619).

1절의 문맥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신본주의 신관을 담고 있다. 다시해석하면, 그 말씀(Logos)은 영원한 때부터 스스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 안에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 이셨다. 즉, 근본 “영원한 하나님으로 부터 왔으며, 말미암고, 돌아가는” 작정의 뜻이 영원 안에 감취인 비밀임을 통찰케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존재의 비밀을 계시 하시려는 선한 뜻이며, 이에 따라 나의 나됨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이 따라나온다.

2절의 문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계시의 방편으로서 메시아( Messiah/왕·제사장·선지자)관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로부터 교회론이 설명될 수 있다. 즉 영원한 때부터 하나님의 예정(계획) 안에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 작정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아래 교회는 하나됨(union)을 이루고 그 안에 성도들은 지체로서 각기 특별한 다름(unique)을 유지하며 다양성을 띤다. 다양한 지체들로 보이지만 이는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 어찌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가!

# 전통신학과 차별화되는 하나님 중심의 말씀운동

 말씀운동의 신학적 관점은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에 근간을 두고 있다. 성경신학은 16C 종교개혁과 이후 그 계승자들에 의해 견지해 왔던 기존 전통개신교 체제의 전통신학과는 신학적으로 차별화된다.

먼저 전통신학은 AD 4세기 중세 교부시대 이후 16세기 종교개혁 이전까지 기독교 교회사의 암흑기를 배경으로 한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대신 인간 교황중심의 사제 집단에 의해 성경의 권위 위에 군림했던 로마 카톨릭 교회체제의 교권에 의한 전횡에서 비롯된 어두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전 구라파가 비진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게 섭리하신 혼돈과 공허 가운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게 하셨다.

이는 ‘빛이 있으라!’ 하신대로 하나님의 주권은 마틴 루터와 존 칼빈에게 개혁의 기치를 들게 하여 기독교 구체제에 항거하게 하므로 종교개혁을 일으키시기 위함이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절대적 권위만을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을 외쳤던 이신칭의(以信稱義)교리는 당시 개혁의 취지에서는 혁신적이었다.

그러나 단지 아담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죄의 구원에만 치우쳐 성경을 바라본 구속사(救贖史)의 관점이라는 데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성경이 계시하는 본래의 의미를 통일성 있게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 지엽적이고 파편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성경의 통일성 측면에서 성경권위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 결과 비록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그리고 정확 무오성을 주장하였지만 성경의 논리적 구조와 의미의 통일성 측면에서 논리의 모순으로 비진리의 도전에 대응하지 못했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聖經神學)은 성경의 절대권위를 주장하는 16세기 종교 개혁의 정신을 공유한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으로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셨고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작정의 뜻을 예정(계획)하셨음을 더 깊이 천착하였다. 30여 년 전 부터 말씀운동이 태동되고 이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일관된 진리를 확증한 21C 신학의 혁명을 보게 하셨다.

지금은 (재)성경신학연구소를 중심으로 교회의 체제개혁을 통한 말씀운동의 제2기의 전환점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성취해 가심을 본다. 성경신학의 신학적 근거는 성경 본래의 의미가 오직 하나님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의 영광선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 목적을 향한 논리적 통일성을 확보했다.

성경신학의 논리에 의하면 신구약 성경은 1600여 년간에 걸쳐 각기 다른 40여명의 기자(記者)들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일점일획의 가감 없이 기록하게 하시어 언약 성취의 논리적 구조 위에 의미의 통일성을 이루게 하셨기 때문이다. 즉, 성경의 해석학적 구조의 틀은 전체 66권이 파편화된 내용(the fragmentation of message)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통일성에 의해 증거되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영광선포이다.

이는 그 의미의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여러 모양의 그림자적 예표에 의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언약하신대로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1:14)실체로 오신 예수가 율법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취로 인해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하나님 우편 보좌에 계시며 약속 하신 성령을 보내시어 만물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므로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은 아버지로부터 오신 유일하신 분의 영광이시다.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예수는 구약에 언약된 그리스도이신 확증(요1:9-14)에 의하여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신실하게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이름의 영광을 바라보게 한다. 지금도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며 만물 위에 세우신 신령한 교회를 통해 만물의 의미가 충만하게 된다.

이는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여호와를 경외케 하시며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찬양하게 하시는 근거이다.

# 결 론

18C 계몽주의 이후 서구신학은 성경의 절대 권위와 영감, 그리고 통일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이라는 신학의 그릇된 방법론이 자유주의 신학으로 둔갑하여 구라파 교회의 생명력을 이미 잠식해 버렸다.

20세기 말 그리고 21세기 현 시점에서 종교 다원주의와 포스트 모던니즘으로 옷을 갈아입고 도전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사상인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에 의한 불확실성과 상대주의(relativism)를 앞 세워 교회의 성도들을 신비주의, 기복주의, 그리고 탈교회주의로 오도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시대 성경을 통해 성령에 의하여 계시된 진리의 본질을 바로 깨닫지 못하여 방황하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태초부터 예정하신 경륜에 따라 특별하게 부르시므로 말씀운동에 동참하게 하시는 은혜의 섭리가 있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8-10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그 분의 기뻐하시는 의도를 따라 그 분의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이 비밀은 때가 찬 경륜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 곧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을 다 통일시키려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씀이 오늘 말씀운동에 동참한 성도들에게 성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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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문제란 무엇인가?〈下〉
64,“예루살렘 성읍을 건설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