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부친 여덟번째 글
아름다운 신들의 신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남은 인도생활의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해 일부러 가진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었거든요. 이곳에서의 삶은, 그동안의 제 삶과 겹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먹는 것, 만나는 사람, 사는 곳, 일터, 주변 환경, 언어 등… 처음에는 그것이 신나고 흥미롭더니 시간이 갈수록 고단해졌습니다. 말씀에 대한 공감과 소통을 틈틈이 나눌 수 없다는 것도 힘들더라구요. 뜻대로 풀리지 않는 관계, 갈등, 그로인한 상처, 달려들고 달려들어도 해결되지 않는 일들, 타국생활의 스트레스. 온 몸의 구멍으로 물이 들어차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 때마침 한국에서 온 친구 덕에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지요.
나를 늘 괴롭히던 감정과 기억이 산재한 장소를 벗어난다는 것만으로 큰 환기가 되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나는 하나의 익명이 되었고 여행지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제야 비로소 숨통이 트였습니다. 그 자유함 속에서 스스로의 문제 해결을 위한 걸음을 디뎠습니다.
그렇게 처음 찾은 장소는 중국 정부의 박해를 피해 이주 온 티벳인들이 사는 산간 마을이었습니다. 인도에 있다는 사실을 잊으려 인도색이 옅은 곳을 택했는데, 잘 한 선택이었던 듯 싶어요. 함께 여행했던 친구가 부디스트였고 그녀 덕에 티벳에 수련 온 부탄의 스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스님들 방에서 소박한 부탄식 정식을 먹고 달라이라마 사원을 구경했으며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와 그들의 철학에 관해 들었습니다. 내가 이 종교에 관해 왜곡되게 알고 있던 것들, 마음대로 이해하고 있던 것들을 걷어내니 순수한 진실이 보였습니다.
우연찮게, 즉흥적으로 결정했던 다음 목적지는 시크교도들의 성지라는 암리차르. 인도하면 떠오르는 몇 개의 이미지들 중에 꼭 있을, 터번을 두른 그 사람들이 바로 시크교도입니다. 이들은 인간 평등을 지향하고, 신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기를 원하며, 거짓말을 하지 않고(보통의 인도인-힌두교-과 다르게), 여자와 어린아이를 존중합니다. 박물관에서 보았던, 무슬림에게 박해를 당하던 삽화와 사진들은 밤에 불을 켜고 자게 할 정도로 살벌했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신을 믿기에, 이토록 필사적으로 믿음을 지켜내려고 했던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인도 땅에 살면서 다른 인도인과 구별될 수 있게 만든 걸까. 그들의 진리는 뭘까. 늦은 밤에는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황금사원에 들어가 그들의 고요한 예배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향냄새, 주문을 외우는 듯한 나즈막한 노래 소리, 몽환적인 찬양…. 그 앞에 서서 간절함을 갖고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이란.
시크교도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신은 어떤 분입니까? 그는 누구이고 무엇을 했으며, 시크교 교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단마디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랜 시간에 걸친 대화가 필요합니다.” 진리는 간명한 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설명하는데 시간이 요구된다고 합니다.
진리를 공부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 중 하나는, 다른 종교들이 이야기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올바르게 알지도 못하면서 배척하고 배격하는 것은 스스로가 무지하고 편협한 사람임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슬프게도 이 여행의 값지고 특별한 경험에 대해 공감하는 기독교인들은 없었습니다. 어리둥절했습니다. 타종교인들과 우정을 나눈 것이 왜 위험하고 불편한 일인지요. 우리는 강자인데, 진짜를 아는데 왜 하나하나 촉각을 곤두세우며 경계하고 대적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본질의 세계를 믿고 그것을 지향하는 자들이라면 본질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여유롭게 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 진리는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것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타종교에 대한 이해까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닌데 말이죠.
부디스트와 시크에게 감명을 받아서 그런지 저 또한 저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방종에 가까운 자유보단 아름답고 성숙된 구속에 대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절제하고 동시에 헌신하는 모습은 주변으로 하여금 저절로 숨죽이고 존중하게끔 만들더라구요. 하나님을 믿음으로 누리는 자유와 평안, 확신과 담대함을 통해 내가 믿는 신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훌륭한 전도이자 자랑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결국 진리의 문제라는 것은, 진리를 사모하는 자들의 태도와 행동, 사고방식, 마음가짐, 끼치는 영향 이런 것들과도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는 것을요. 적어도 나로 인해 숭고한 진리에 때를 묻히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특별하다는 것과 특이하다는 것은 무섭게 다르니까요. 내 입에 맛있는 부분만 골라 먹으며 편한 대로 행동했었다면, 이제는 내가 사모하는 신에 대해 올바로 알기 위해 애쓰며, 야훼를 믿고 그에게 택함 받은 자로써의 면모를 성숙하게, 아낌없이 보여줄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러 갔는데 하나님은 엉뚱한 것들을 제 앞에 풀어놓으셨습니다. 마음을 연 채로 진지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이것들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무엇을 얻게 하려 하는지. 아이들에게 진짜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싶어 먼 인도 행을 택했던 나, 젊은 나이에 속세와의 연을 끊고 중이 된 사람, 열반에 이르기 위해 수련과 사유를 쉬지 않는 사람, 사원에 온 걸인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나누어주는 사람, 누군가가 발을 씻은 물을 떠 정성껏 입을 맞추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 평생 사원에 한 번 들어가는 게 소원인 사람,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의 표정이 섬뜩하리만치 다른 지도자들, 그 모든 이들의 믿음, 그들의 찬양과 신앙, 그들이 이르기 원하는 것, 그들의 신.
그리고 여호와. 제가 느낀 것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진 않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진리가 아니라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과, 이 모든 위태로운 아름다움 뒤에는 감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강하고 따스한 빛의 근원이 있더라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