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이란?
은사따라 살면서 건덕을 세우는 삶
샤머니즘이 신앙이던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숭상했다. 그리고 조선 500년 동안은 유교를 숭상했다.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불과 170년 전의 일이다.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온 불교문화와 유교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가 들어왔고 전파되었다. 지금도 진행형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에 이제는 기독교가 어떠한 모습으로라도 정착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다. 숭유억불 정책에 의하여 약화되었던 불교는 다시 일어서고, 산속에 자리잡고 있던 사찰이 도시로 나오고 있는 마당에 기독교는 지탄받고 있다.
기독교는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기독교인들 스스로 촛대를 한국에서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로 옮겼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소음을 일으킨다 하여 종을 치지 못하게 하고 차임벨을 울리지 못하게 함은 물론, 예배당 건물이 들어서면 민원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예배당으로 사용하려는 건물은 임대도 주지 않으려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국민을 선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는 정치적인 집단으로서의 기독교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본다면 무리일까?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우리들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바른 교리 체계를 세워야 한다. 그래서 성경적 기독교 신앙생활을 함으로 올바른 기독교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화 충돌은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신앙적인 핍박을 받는 것 외에 건덕의 문제로 지탄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가 지탄받는 것이 문화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오히려 기독교 문화는 정착시키지 못하고 전통문화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변질되고 있다. 그리고 부의 축적과 부정부패, 비상식적인 세습, 정치적 개입 등 종교로서의 역할에서 일탈한 행동을 함으로 지탄받고 있는 안타까움을 보이고 있다.
축적된 부를 초대교회와 같이 나누면 얼마나 좋겠는가?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 주어 자연스레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목회자로서의 삶을 세습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치적 집단으로서의 기독교 단체가 되어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성경적 기독교 가치관으로 무장된 기독교인으로서 정치활동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요즘 한국교회의 단면을 들여다 본다면, 제대로 된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고 정착시키는 것은 그만두고, 선교사들이 들어와 정착시킨 금주, 금연 그리고 도박을 금한 기독교 문화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파괴하려 든다. 세상 사람들도 몸에 좋지 않다고 금하는 음주와 흡연을 하면서 금주와 금연은 성경적이지 않다며 음주와 흡연을 조장(助長)하려 든다. 물론 음주와 흡연이 비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음주와 흡연을 해도 된다. 그렇다고 음주와 흡연이 성경적인 것인 양 생각하고 반드시 행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음주와 흡연을 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삼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이 확실하게 밝히고 있지 않는 사안들 중에 선도 악도 아닌 행위를 일반적으로 ‘아디아포라’라고 하며, 성경에서 명백하게 지켜야 할 원리로 제시하는 것은 ‘디아포라’라고 하는데 루터와 칼빈도 이러한 문제를 고민했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아디아포라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고, 칼빈은 성경에서 명시한 것만 따라야 한다고 아디아포라 영역을 좁게 해석했다. 한 예로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했던 성상이나 의복 등을 아디아포라로 보고 수용했지만, 칼빈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반대하였다. 찬송에 있어서도 루터는 스스로 곡을 만들기도 했고, 루터의 후예들은 많은 찬송들을 만들어 부르며 교회음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칼빈은 예수님이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구절을 들며 시편 찬송만이 성경적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성경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성숙한 기독교인들에게는 할 수도 있으며 해도 되는 일이지만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를 바울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만일 음식 때문에 너의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너는 사랑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그 사람을 너의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마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여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자.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무너지게 하지 마라. 모든 것이 다 깨끗하나,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며 먹는 그 사람에게는 악하다. 고기도 먹지 말고 포도주도 마시지 말며, 네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이란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권(權)을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고전 9:12). 그래서 건덕을 세우는 것이다. 육신의 소욕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 따라 사는 삶이 기독교인들이 살아야 할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들의 삶을 바라보면, 현대 지성인으로서 하나 정도 가져야만 할 것 같은 생각으로 철학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기독교를 나의 종교로 택했고, 외형만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것 같이 체면치레하고, 주도권 다툼으로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의 모습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일명 대형 교회라고 하는 데는 그들대로, 몇 안 되는 숫자가 모여 가족같이 생활할 것 같은 조그만 교회는 그들대로 싸움이 끊이질 않고 있다. 말씀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세속을 좇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지금 어떠한 생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어떠한 생각으로 말씀을 전하며, 말씀을 전할 때에 어떠한 자세로 듣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먼저 기독교에 대한 이해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가? 성도가 무엇인가부터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성도가 무엇인가를 모르니, 직분이 무엇인가는 더욱 모르므로 은사에 따른 직분을 감당하며 살아가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명예와 계급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은 은사 따라 사는 삶이다. 성도 개개인이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올바른 기독교 문화가 형성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겠지만, 우리 스스로가 기독교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갈 때에 진정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