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종교 개혁자로서 칼빈의 활동_ 07
어떤 분이 말하기를 리포메이션(Refor-mation)이란 말을 한국말로 종교 개혁이라고 쓸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차라리 교회의 개혁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한다. 그런데 그때 당시 유럽의 모든 국가는 가톨릭이란 한 종교, 한 교회만이 있었기에 종교 개혁이란 말이나 교회 개혁이란 말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어쨌든 칼빈은 제2세대의 종교 개혁자로서 루터의 불완전한 개혁을 더욱 확실하게 조직하고 과격한 제세파를 정리하고 당시에 숱한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의 입을 막고 이단들과 자유주의자들에 맞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고 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학과 신앙의 기초임을 확실히 변증하였다.
성경 번역 운동이 종교 개혁의 밑거름이었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승천 그리고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초대 교회가 세워졌다. 초대 교회는 말할 수 없는 고난과 박해를 통해서도 그 생명력은 꺾이지를 않았다. 초대 교회는 박해 중에 수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걸출한 교부들의 위대한 작품들이 줄을 이었다. 폴리갑, 져스 틴 마터, 클레멘트, 아다나시우스, 암부로스,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이 복음적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화했다. 그들의 성경 강해 설교, 그리고 교리적 체계는 가히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혹독한 박해가 오히려 복음을 더욱 힘있게 붙들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서부터 점점 교회는 세속화되고 박해 때 지켜오던 순수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점점 사라져서 형식 종교, 그리고 의식 종교로 전락하면서 말씀의 종교 복음적 기독교는 점차 힘을 잃고 변질되어 갔다. 심지어 그러한 형식적 교회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 오히려 비복음적이고, 이교적인 예배까지 받아들이고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성물 숭배를 하는 가톨릭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교황의 칙령과 전승이 성경 위에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약 1,200여 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더욱 심화되어 기독교는 다른 종교로 변질되었다. 밤이 깊으면 별빛은 더욱 찬란해진다고 했던가? 그런 와중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경건한 수도사들이 성경을 필사하거나 번역하면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칼빈의 앞길을 막으신 하나님
사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된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하룻밤을 호텔에서 묵고 다음 날 떠나려던 그날 저녁 제네바에서 개혁 운동을 하던 파렐을 만나게 된 것이다. 파렐은 열정이 대단했고 직선적이지만, 반면에 리더쉽이 부족하고 조직력은 뒤떨어졌다. 파렐은 「기독교 강요」를 저술한 젊은 학자 칼빈이 제네바에 하룻밤을 유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밤에 칼빈을 찾아갔다. 파렐은 제네바의 형편을 말하고 칼빈 같은 유능한 지도자가 제네바시를 개혁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물론 칼빈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20세나 어린 칼빈에게 끈질기게 설득하다가 안 되니 나중에는 만약 칼빈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평안만을 생각한다면 요나의 길을 갈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고함쳤다. 사실 칼빈은 이 말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려 파렐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로잔의 신·구교 대논쟁에서 승리한 칼빈
실로 칼빈은 제네바에서는 이방인이요, 나그네요, 외국인이었다. 칼빈을 지지하는 그룹도 없었을 뿐 아니라, 시의회의 각종 회의가 제네바를 이끌어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칼빈을 눈여겨보는 사람도 지도자로 평가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냥 한 불란서 사람 정도였다. 그런데 1536년 10월 1일에 로쟌에서 신·구교 간에 공개 토론회가 벌어졌다. 구교측에서는 난다긴다하는 대학자들이 나섰고 많은 평신도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가톨릭주의지들은 교부들의 원전을 이용하면서 가톨릭교회만이 참된 교회이고 개혁자들의 신학과 신앙은 이단이며 잘못됐다고 논박했다. 그러나 신교측에서 파렐과 비레, 칼빈이 참석했다. 이때 파렐과 비레는 정식 토론자였고 칼빈은 그냥 방청객에 불과했다. 칼빈이 토론을 신청한 후 교부들의 원전을 종횡으로 인용하면서 로마 가톨릭의 허위를 낱낱이 파헤치며, 개혁 교회의 주장이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며 정통적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그런데 칼빈의 논증에 회의장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칼빈의 논증에 로마 가톨릭 대표들도 꼼짝 못 했다. 그리고 이 토론회는 개혁자들의 완전 승리로 결말이 됐다. 한편 개혁 신앙을 지키려고 방청했던 사람들은 칼빈의 신학에 놀랐다. 과연 「기독교 강요」를 쓴 저자다운 실력을 만천하에 인정받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사람들은 점점 칼빈의 탁월한 조직력과 놀라운 신학 지식에 압도당했다. 그 후 1536년 10월 16∼18일에 베른에서 루터파 대표들과 회의에서도 칼빈의 개혁 신학에 대한 엄청난 실력과 조직력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사실 칼빈이 제네바로 들어갔을 때는 그냥 성경 교사였다. 그리고 설교자에 불과했다. 그는 무명의 성경 교사에서 지역주의, 국가주의를 뛰어넘어 종교 개혁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었다. 사실 칼빈 자신은 한때 인문주의자로서 조용히 연구 생활, 집필 활동이나 하면서 살려고 했는데 그의 주변 환경과 역사가 그를 고요히 놓아두지 않았다.
하나님의 도구로 변한 칼빈
잘 알듯이 칼빈은 깡마른 외모에 가냘픈 체구에 병색을 가진 자였고 선천적으로 대중에게 나서기를 꺼리던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파렐에게 붙들린 것처럼 그의 생애가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므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했지만, 고난받는 개혁교도들을 위해서 그는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칼빈의 성격과는 반대되는 그 용감한 진리의 변호자로의 변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절대로 손상될 수없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신학과 신앙의 표준이란 확신이 그로 하여금 옛날에 소심했던 그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가 한 때 인문주의자로 법학도로서, 언어학자로서의 삶은 이제 종교 개혁자라는 소명에 용해되어 버렸다. 27년 동안 고요했고 소심했던 칼빈이 제네바에 입성함으로써 변화의 사람, 능력의 사람, 의지의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칼빈의 가슴에서 폭발한 동력과 힘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에서 나온 것이다.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고백이 칼빈에게 적용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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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칼빈과 제네바_08 |
고난을 통해서 전사가 된 칼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