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칼빈과 제네바 아카데미_ 11
칼빈의 가슴 속에는 꿈이 하나 있었다. 그 꿈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오고 오는 세대에 전달하기 위한 일꾼을 키워내는 일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혼합주의적이고 미신에 물들어져 있는 교회를 성경적인 교회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교회에서의 설교나 제네바 종교회의로는 어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에 입성하자마자 청소년들을 위한 신앙 훈련서를 만들어 쓰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제네바의 교회뿐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개혁 교회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칼빈은 일차 제네바의 사역이 실패로 돌아가자 스트라스부르크로 피난갔었다. 칼빈은 그곳에서 교육의 선봉장인 스트륨을 만나 교제하고부터 교육에 대한 확실한 밑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장차 개혁 교회를 지도할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단순히 목회자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일 수 있는 평신도 지도자를 동시에 키우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실 교회는 한 목표를 향해서 두 개의 수레바퀴가 동시에 움직일 때 앞으로 갈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칼빈의 혜안은 정말 탁월하다고 하겠다. 설교학자들은 설교 없이 구원 없다고 할 것이고, 선교학자들은 선교 없이 구원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 기독교 교육학자들은 교육 없이 구원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칼빈의 심중에는 그 셋을 모두 아우르는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를 키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개혁주의 대학과 신학교의 밑그림을 그리다
칼빈은 이미 1537년과 1541년에 고등 교육을 위한 대학의 필요성을 선포했다. 1541년에 작성된 규정에서 미래를 위한 인재 양성은 우리의 자녀들을 교회를 떠나 광야로 넘겨주지 않기 위함이라고 했다. 또 목사 양성 과정을 세워서 청년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칼빈의 이러한 꿈은 당장에 실현되지 못했고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559년에 와서야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되었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는 제네바 시당국의 몰이해와 비협조도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칼빈의 뜻에 선뜻 동조하는 교수들의 확보도 문제였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건물이 있어야 했다. 칼빈은 아카데미 설립을 위해서 설득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후원자를 모집했다.
개중에는 부자들이 선뜻 성금을 내기도 하고 특히 프랑스에서 온 피난민들이 모금에 발벗고 나섰다. 또 변호사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에 유산을 선한 교육 사업에 쓰도록 함으로써 엄청난 효과를 얻었다. 문제는 교수 요원이었는데, 때마침 베른에서 칼빈주의자들을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예컨대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와 비레(Viret) 같은 대학자들이 제네바로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1559년 7월 5일에 이른바 제네바 아카데미 곧 칼빈 대학 또는 제네바 대학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열 살 아래인 베자를 학장으로 앉게 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잣대로 이해 안되는 것이 하나 있다. 칼빈이 그토록 정성을 다해서 우여곡절 끝에 제네바에 대학을 만들었으면 응당 자기 자신이 초대학장으로 취임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는지? 그러나 칼빈은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린 베자를 학장으로 앉게 했다. 그때 칼빈의 나이 50세였고 베자는 40세였다. 칼빈은 젊고 유능한 신약 학자인 베자를 제네바 대학의 학장으로 앉히고 자기는 대학 개교식에 기도 순서와 대학 운영 규칙을 낭독하는 것으로 하고, 그냥 그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리고 대학 운영의 전권을 베자에게 위임했다. 여기에서도 종교개혁자 칼빈다운 모습이 드러난다.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고자 하는 그의 겸손함을 볼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믿음의 후계자인 베자는 그로부터 40년간을 더 살면서 칼빈의 모든 저작들을 모아 출판하는 일과 칼빈의 일대기를 쓰는 등 놀라운 일들을 계속했다.
하나님의 학교, 경건과 학문의 중심
제네바 아카데미는 대학이 중심이기는 해도 예과를 포함해서 7년 과정이었다. 7년 과정에서 김나지움 곧 문법학교와 대학 과정이 함께 있었다. 대학에서는 성경 원어와 철학과 신학을 가르쳐 신학자와 목회자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문법학교에서는 당대의 인문학을 골고루 가르쳐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진 인문학자들을 길러내는 데 주력했다. 처음 개교를 하자마자 유럽 각지에서 개혁의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 160여 명이 몰려왔다.
지금부터 450년 전 신문도 방송도 없고 TV도 없었던 시절에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몰려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160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왔다. 그 학생들은 제네바는 말할 것도 없고 멀리 스코틀랜드, 영국, 화란, 독일, 헝가리 그리고 프랑스 등지에서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속속 몰려왔다. 실제로 제네바 아카데미는 사도시대 이후에 가장 경건하고 가장 수준 높은 학문을 가르치는 이상적인 학교였다. 사실 제네바 대학은 개혁주의 신학의 센터이자 개혁주의 선교 센터이기도 했다. 여기서 철저히 훈련받은 학생들이 각기 자기 모국으로 돌아가서 개혁교회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독일 민족에게만 영향을 끼쳤으나, 칼빈은 세계적으로 그 사상을 널리 폈다. 칼빈은 제네바 대학 개교 시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이여 이 학교가 경건과 학문이 있는 학교가 되게 하시옵소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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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
칼빈과 제네바 아카데미, 그 후_ 12 |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_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