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예수 그리스도인가? 나사렛 예수인가?
칼 바르트가 제시한 “엔텔레케이아(entelekhe-ia, entelecheia)”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어휘로 “완성태”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예수의 성육신이 엔텔레키이아가 신적 본질이 아니라고 규정하며 육신 이해를 연결시켰다.
권호덕은 「칼빈과 바르트의 동정녀 탄생 이해 비교」(『한국개혁신학』, 41권, 한국개혁신학회, 2014)를 발표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취하신 몸이 타락 후 아담의 몸인가? 타락 이전의 몸이었는가?’에 대한 논문이었다. 칼빈은 두 가지 의견을 모두 갖고 있지만, 바르트는 타락 후 아담의 몸을 가지고 성육신함을 암시한다고 발표했다.
바르트가 타락 후 아담의 몸으로 성육신했다는 개념이 정통 신학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바르트는 그보다 더 과격하게 예수는 일반 인간과 차이가 없는 수준으로 제시한다. 그럼에도 구세주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르트 신학의 독특성이고 논리의 비약이다.
바르트의 특징은 모든 답을 하나님에게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성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성이 되는지에 대해서, 증명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돌린 것이다. 현실성은 매우 어려운 개념이다. 이기상은 “작용을 미칠 수 있음”으로 제시했다.
바르트의 독단은 현실성을 일회적(einmalige, one-for-all)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 일회성에 신적 권위까지 부여했다.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일회성으로 규정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독특하게 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경의 예언과 회상에서도 일회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일회성이게 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만 한 행위를 선취와 반복이 없는 일회성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간의 중심과 완성으로 보는 것은 바르트의 신학이 기독론적으로 평가되어도 합당한 부분이다.
바르트는 예수의 선재와 후재를 말하면서, 나사렛 예수로 접근한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와 19세기 실증주의(불트만 등)를 비판하는데, 그들은 일회성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예수를 일반화시켰고, 실증주의는 신화화했다. 바르트는 사도가 증언한 행 4:10 이하, 빌 2:9, 유다서 3절, 히브리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일회성을 부여하고 있다.
바르트는 단일한 그리고 일회적인(einfache und einmalige)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에 대해서 신약성경에서 증거를 찾는다고 전개한다(KD., 15, GG., 30, CD., 13). 바르트는 “나사렛 예수”라고 제시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사렛 예수”는 엄격하게 이해하면 구분될 수 있다. 바르트는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규정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정식 어휘이다. 바르트는 나사렛 예수에 “인간”을 첨가해서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제시했다. 바르트는 이중 명제(doppelte Satz)를 제시하는데,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것이 신약성경의 증거라고 제시하면서, 그리스도론적 교리에서 삼위일체에 해당하는 성경 본문이 없다고 제시했다. 즉 성경에서 그 말(삼위일체)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위일체가 성경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학을 부정하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현실성”, “선취” 등의 핵심 어휘도 성경에 없으며 교리적 논의도 없었다. 교리는 성경해석을 놓고 논쟁하여 형성한 것이지 개인이 사색하여 내놓은 것이 아니다. 성경에 아버지, 아들, 성령이 등장한 것은 인정하지만, 삼위일체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마가복음의 첫 문장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추가된 어휘이고 원문에는 없을 것으로 제언한다. 공관복음서에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고백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성경을 비평적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바르트는 자기 이해를 명료하게 밝히는 학도적인 자세가 있다. 한국 신학도들도 자기 이해를 명확하게 밝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사상 논의를 할 수 있다. 바르트가 제시한 “아마도 원문에 없었을 것”이나 “지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부당하다. 학자의 양심이겠지만, 추측이 확대되어 다수가 지지하는 의견이 되면 정설로 자리 잡게 된다. 바르트의 신학은 가능성으로 시작한다. 자유주의는 첫 명제의 근거가 사색하는 학자의 것이었다. 우리는 신학을 믿음과 계시에 근거해서 시작하며, 가능성이나 개인의 사색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면 이해가 아닌 믿음을 증진하며, 주 예수를 높이는 방향으로 전개한다. 바르트는 최소한 겸손하고 소극적으로 전개하는데, 그래서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확정하고 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서 신약성경에서 2차적 요소로 규정했다. 결국 성육신을 신약성경의 본질로 말하는 것을 부정했다. 성육신이 아닌 종말론적 관점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이후에 종말론을 강조하는 것은 재림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역사 발전을 강조하는 것이다. 변증법 역사관은 미래에는 보다 더 이상적 세계가 등장한다는 낭만적 사관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세계관이 혼재하기 때문에 시간의 끝과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바르트의 종말론적 이해 뒤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신학이 등장했는데, 정치 신학(Political theology)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구도를 제언했다. 후천년설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후천년설보다 더 과격한 항속적인 이상적인 공동체 유지이다. 최경환은 정치신학과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을 연결하여 제시했다(『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도서출판 100, 2019). 바르트는 사회주의 사상이 변함없이 유지되었다고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는 주장했다.
바르트는 이중명제를 “하나님의 아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며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는 교묘함을 보이고 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사역인 구속을 빼고, 화해자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그리스도를 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휘는 반복하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인 구속을 성령으로 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바르트 신학에서 구속주는 성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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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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