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8-05-02 20:0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진리의 주요한 특성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이다. 예수께서 스스로 자기가 진리 되심을 선언하셨다. 그 구성 요소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다. 구약성경의 언약대로 신약성경에서 성취된 말씀이 바로 진리이다. 이러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연결을 통하여 확증된 진리의 특성을 간단히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 진리의 특성은 매우 많다. 거룩한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 거룩한 성질은 진리의 주요한 특성일 수 있다. 또 성경진리는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상대적인 인간의 말이 아니고 절대자이신 신(神)적 계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에 근거하여 진리의 특성들을 열거한다면, 많은 것이 나열될 수 있다.

이러한 진리의 특성들 가운데서 교육성과 통치적 성질을 선택하여 좀 더 깊게 분석해 보고자 한다. 교육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자체가 살아서 운동하며 가르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히 4:12). 또 진리가 다스린다는 통치성은 바로 교육성과 아주 밀접하게 관계되고 연계되어 있다. 너무도 유명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진리 인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결과로서, 그 자체에 교육적인 성질과 통치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이렇게 밀접한 진리의 교육성과 통치적인 성질을 나누어 간단히 고찰하고 분석한다.

1) 교육성

일반 교육은 인간이 인간을 교육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곧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인도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성경을 포괄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보면 볼수록 이 성경의 논리는 너무도 명백하며 분명해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리의 원천이시며 본체이시다. 이러한 것은 구약성경의 역사서를 통하여 결과적으로 따라온 시가서(욥, 시, 잠, 전, 아)를 보면 놀랄만하다. 욥이 친구들과 논쟁과 토론을 벌이는 가운데서, 교육의 주관자는 주요한 주제이다. 욥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충고하려는 방문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대부분 교사가 되어 주관적으로 하나님을 거론하며 가르치고 질책하였다(특히 욥기의 4장부터 14장까지 참고). 바로 욥기의 앞부분에서 참된 교사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논쟁한 것은 주요한 주제이다. 그 방문자들은 욥을 상대적이며 인간적으로 요리하며 충고하고자 하였다. 그 논쟁과 토론의 참된 감찰관과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누가(who)"를 부각시켜 명확한 답변을 주셨다. 시편의 150편 가운데서도 상당한 부분이 찬양을 통하여 메시아를 언약하시며 여호와의 선지자적인 성질을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3편부터 41편까지에 걸쳐서, 여호와께서 고난을 주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건져 주시기까지 하심을 자세하게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적인 성질에는 항상 통치성도 함께 결부되어 있다. 잠언서는 여호와의 주권적인 성질을 찬양하고 있다. 이 주권성도 바로 진리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처럼 여호와의 속성이나 진리의 속성들은 마치 손바닥이나 손가락처럼 하나 같이 다 연결되어 있다. 잠언서 중 특히 10장부터 15장까지에서 여호와의 교육성이나 교훈성을 강조하고 있다. 앞의 1장부터 9장까지에서 여호와께서 지혜를 주관하신다고 매우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진리의 교육성은 바로 마음을 주관하심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도서의 앞부분(1~7장)은 인생들의 무익한 행사들을 통하여 여호와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 가운데 전도서 3장의 뒷부분에서 인간의 혼(魂;靈)을 통하여 인간과 짐승과의 동일점과 차이점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앞의 히브리서에 나오는 것처럼 영과 육(肉) 그리고 혼적 작용을 통하여 진리의 교육적인 성질을 아주 강조하고 있다.

2) 통치성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이 진리의 통치성은 교육성과 너무도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논리 전개의 편의상 연결을 위하여 나누었으므로, 아주 간략히 서술함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진리가 인간을 자유하게 한다는 이 말씀은 진리의 통치적인 성질 중에서도 핵심이다. 여기서의 자유(自由)는 말 자체로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것에서 출발함이다. 그런데, 동서고금에서 인간 스스로 고뇌와 번뇌와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인류의 죄악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참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를 얻는 데 있어서 진리를 배제하고 가능하겠는가?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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